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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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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종수
댓글 0건 조회 698회 작성일 25-12-22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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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모든 사람들은 온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 인식한다. 남에게 벌어진 사건은 그저 남의 일로 나와는 무관하고, 안 그런 척 연기하지만 본능적으로 복잡하고 나쁜 일에는 스스로가 배제되기를 희망한다. 윗집 혹은 아랫집 아무개 동네 친척까지 어떻게 사는지 훤히 꿰던 20년 전, ‘관계주의’와 ‘정겨운 이웃사촌’이란 단어들이 어색하지 않았던 예전과 반대로 ‘개인주의’와 ‘계산에 입각한 행동’이 자연스러워진 요즘 사회를 보면 여러 생각이 든다.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본능에서 비롯된 인간성의 한 면모가 발현되는 것인가 아니면 감정이 완전히 소멸한 기계 같은 사람만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것에 유리해진 것인가를 고찰하게 되지만, 거대하고 분명한 흐름 앞에 미미한 존재인 나도 그저 무력하고 차가워진 사회를 흐릿한 눈으로 관망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마치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살아있는 유기체를 보는 것 같아 흥미롭기도 하다.

 

 톨스토이가 19세기에 창작한 이반 일리치도 그런 면에서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인물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업무와 사교 능력이 뛰어났고, 판사 일도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해서 수행하는 사람이었으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자기만을 위한 일에 불과했다. 정확히는 작중 인물들이 이반이라는 사람 자체를 존경하기보다 그의 높은 지위와 권력을 우러러보았다. 그의 명석하고 아름다운 아내마저도 그저 자기를 빛낼 장신구로 소모하는 느낌을 받았고, 이는 고된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가정을 소홀히 하며 카드 놀이에 몰두하다 혼자 잠에 드는 그의 일상으로부터 알아챌 수 있다.

 

 그러던 이반 일리치가 이사를 가고 새 집을 단장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서사가 급격하게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다. 도배장이 앞에서 커튼을 직접 다는 시범을 보여주다가 넘어져 부상을 입는 사건으로 이반의 성공가도가 꺾이기 시작하며 입장이 반전된다. 왕진 의사는 환자의 목숨과 절박함에 공감해주기보다 증상과 숫자만 읊을 뿐이고, 가족마저 악화되는 병세를 이반의 탓으로 돌리며 마치 이반이 죽을 때를 기다리는 듯 무관심했다. 그의 임종을 지키며 불편함이 없도록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간병인 게라심조차도 이반의 입장에서는 본인을 진심으로 아껴주는 고마운 존재로 인식되었지만, 결국 그도 이반이 죽어야 끝나는 그저 하나의 일로써 그를 대했을 뿐이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진지하게 통찰한다. 그러나 독자의 예상과 달리 ‘나쁜 삶’이 결국 ‘나쁜 죽음’으로 이어진 것에 대한 자아성찰 과 반성의 결말 대신, '인간은 누구나 죽고,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죽는다' 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면서 더 이상 죽음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숨을 거두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우리에게 윤리적인 교훈, 이를 테면 ‘착하게 베풀며 살다 가는 사람이 좋은 죽음을 맞이한다’ 라는 단순한 깨달음을 주는 것이 아닌 듯하다. 미지의 대상인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오롯이 그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면 비로소 한 존재가 겪는 삶의 모든 불안과 세상의 두려움은 그저 사소한 것임을 일깨워주는 어떤 초월적인 진리를 고찰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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