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대, 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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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대, 당근 ”
- Netflix 社 「흑백요리사 : 요리 계급 전쟁」을 보고 -
처음 유튜브라는 매체가 생기고, 넷플릭스와 같은 OTT가 일상이 되었을 때, 나는 이러한 매체들이 지닌 유익함보다 해로움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요즘 아이들은 유튜브로 생활 지식이나 사회생활을 배운다고? 과연 수익성에 기대어 만들어진 영상물들이 현대 사회에 긍정적일 수 있을까? 학창 시절부터 현장 수업과 스스로 책을 찾아보는 학습을 고집해 온 나에게, 이러한 편견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새로이 생겨난 이 매체들은 우리 사회에서 꽤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다만, 한 가지 전제만큼은 잊어서는 안 되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매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취하는 개개인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을 취하는 개개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문제가 될 수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같은 도구도 누군가에겐 해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기회가 되듯이 말이다.
다시 이야기의 중심으로 돌아와서, 전 세계의 문화 흐름을 선도하는 넷플릭스에서도 한국 콘텐츠는 여전히 가장 선두에 서 있다. 수많은 작품들이 이른바 ‘K-culture’를 이끌고 있지만, 최근 가장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을 꼽자면 단연 「흑백요리사」일 것이다. 이번에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한 이 작품은, 매체 특성상 재미와 자극이 앞섰던 첫 시즌과 달리 한층 더 철학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물론 그 질문이 무엇으로 읽히는지는, 이를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 작품을 보며 ‘지금’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작품 전반에 흐르는 메타포(Metaphor)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상징은 ‘안대’였다. 이 작품은 이미 명성과 실력을 인정받은 요리사들을 ‘백수저’로, 아직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충분한 역량을 지닌 요리사들을 ‘흑수저’로 나누며 시작한다. 다수의 흑수저 가운데서 백수저에 맞설 소수가 선발되고, 이후 이들은 1대 1 요리 대결을 펼친다. 이 대결의 핵심은, 심사위원이 안대를 착용한 채 요리를 평가한다는 점이다. 누가 어떤 요리를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맛과 완성도로만 판단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안대’가 시사하는 의미는 분명 ‘공정함’이다.
다수의 인원에서 소수의 선발이 되기 위해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흑수저들과 달리, 이미 그들이 쌓은 명성을 인정받고 처음부터 소수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백수저들의 모습에 이미 첫 번째 공정함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 실력을 증명했던 흑수저들에게 오로지 그 실력만으로 백수저를 상대할 수 있게 된 ‘안대를 쓴 요리 심사’가 두 번째 공정함으로 각각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시청하는 사람들은 그 ‘공정함’에 매료되고, 열광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구조가 결과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의미가 치우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흑수저가 이길 때에는 ‘역시 실력은 명성을 이긴다’는 쾌감이, 백수저가 이길 때에는 ‘그 명성에는 이유가 있었다’는 존중이 남는다. 이렇게 단순한 장치로, 이토록 건강한 양방향의 감정을 만들어내는 상징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이러한 공정함의 감각은, 단 7인만이 남았을 때 주어진 ‘당근 지옥’ 미션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때부터는 백수저와 흑수저의 구분조차 사라진다. 모두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재료—당근—을 받아 요리를 해야 한다. 이제는 누구도 출발선이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오로지 ‘나’라는 존재만이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변수다. 그렇기에 패배의 이유를 환경이나 조건에서 찾을 수 없고, 결국 책임은 온전히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렇게 보면, 공정함이란 말의 참된 의미는 어쩌면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떠한 차이(差異)의 변명도 할 수 없는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당근은, 나에게 어떠한 깨우침을 준 또 하나의 메타포였다. 그러나 앞선 ‘안대’에 비하면, 무언가 공정함을 나타낸다는 것은 같지만 그 공정함의 체감은 조금 다르다. 안대는 나를 평가하는 이에게 씌워진다. 따라서 나로 인한 변수마저 제거된, 거의 이상에 가까운 공정함이다. 반면 실제 작품의 맥락에서 잠시 벗어난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당근은 다르다. 단 하나의 재료일 뿐인데도, 단 하나의 전제로 공정함은 쉽게 흔들릴 수 있다.
내게, 당근이 없다.
당근 요리를 해야만 하는데, 내게 처음부터 당근이 없다면. 가장 먼저 환경을 탓하겠지만, 그렇다고 드러내지는 않는다. 우리의 인생은 동화 속 세상처럼 온전히 이상적인 공정함이 유지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미 곱게 주어진 당근으로 요리를 시작할 때, 어떻게든 당근을 찾아 밖으로 나서야만 한다. 누구는 이미 손질을 마치고 조리에 들어갔거나, 누구는 오래전부터 전해져 온 비법 소스를 당근에 섞어 내기만 하면 맛있는 요리가 될 모습을 보면서도, 당장 없는 당근부터 구하러 나갈 수밖에 없다. 귀중한 시간을 들여 당근을 사 오고 포장을 뜯어보지만, 당근이 아니라 순무였다. 이번에는, 직접 밭을 찾아가 하나하나 확인하며 당근을 뽑아 오는데, 그마저도 어쩔 수 없이 벌레 먹거나 흙이 많이 묻은 것들 뿐이다.
그렇게 돌아와 보게 될 것은, 처음부터 주어진 당근으로 요리하다가 뜨거운 냄비에 살짝 데이고 차가운 물에 잠깐 시렸던 순간에 볼멘 소리를 내면서도, 요리는 다 되어가는 다른 이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거친 땅을 파내며 겨우 당근을 쥔, 흙 먼지가 가득한 손은 ‘공정함’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그저 서둘러 씻어내고, 그제서야 ‘당근 요리가 될 것만 같은’ 요리를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근이라는 상징이 말해줄 수 있는 건, 적어도 당근 요리를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당근 요리가 하기 싫다며 팽개치고 도망가는 이도 있고, 당근이 주어지지 않았다며 화부터 내는 이도 있는데, 그 속에서도 도망치거나 불평하지 않고 당근을 찾아 어떻게든 시작해보려는 태도 말이다. 이러한 태도가 지켜낸 가장 큰 가치는, 안대를 씌운다거나 똑같은 재료를 주고 똑같이 시작하는 것 따위가 흠집 낼 수 없는, '스스로 만들어 낸 공정함'이다. 공정함이란 형식으로나 의미로나 모두에게 동일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결국 그 끝은 스스로가 공정하다고 받아들이거나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는 역설을 낳는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공정함은, 도망치지 않았기 때문에 시작되었고, 어떻게든 나섰기 때문에 지켜졌으며, 그렇다고 꼭 남들만큼의 요리가 될 수 없음을 이해하기에 완성되었다. 어쩌면 작품 속 한 장면처럼, 환하게 빛나는 조명 아래 예쁜 접시에 차려진 요리들 사이, 조명이 꺼진 조리대에서 이제 막 씻어낸 투박한 당근일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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