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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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크리스마스 서점 나들이, 그리고 브람스
작년 크리스마스부터 우리 가족은 교보문고에 가기 시작했다.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각자 읽고 싶은 책 한 권씩 고르는 시간을 가지고 근처 카페에서 두 시간 정도 책을 읽으며 쉬는 게 전부다. 사람 많은 데서 기운 빼는 것 보다 이렇게 각자 책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나한테는 진짜 휴식처럼 느껴졌다.
이번에 내가 고른 책은 ‘미술관 여행자를 위한 도슨트 북’ 학교 송년회 자기 다짐에 사용된 사진의 주인공이다. 평소 그림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여행 갈 때 다시 한번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 골랐었다. 아들은 만화 코너에서 ‘주술회전’ 최신판을 들고 기웃거리고 있다가, 결국 "오늘 같은 날까지 만화책은 좀 그렇지 않냐?"는 아내의 단호한 한마디에 투덜거리며 ‘양심고백’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아내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샀다.
카페에 앉아 책을 읽던 아내가 먼저 읽어보더니 꽤 진지한 표정으로 나한테 건넸다. 내용이 깊고 재밌다며 꼭 한번 읽어보라는 추천이었다. 아내의 안목을 믿는 편이라 읽던 미술관 책을 덮고 아내의 소설을 건네받았다. 사실 책이 너무 얇은 것을 보고 ‘너로 결정했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솔직히 제목만 보고는 뻔한 로맨스 소설일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소설이 참 건조하고 냉정했다. 서른아홉의 폴, 그녀를 사랑한다면서도 제멋대로 구는 로제, 그리고 폴에게 불쑥 나타난 스물다섯 살 시몽. 사강의 문장은 감정을 억지로 쥐어짜기보다 주인공들의 속마음을 무심하게 툭툭 던지듯 보여줬다.
시몽이 폴에게 보낸 편지 속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폴은 그 질문을 받고 당황한다. 자기가 브람스를 좋아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로제라는 남자의 스케줄과 기분에 맞춰 자신을 지워가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 질문은 음악 취향을 묻는 게 아니라, “당신은 아직 당신으로 살고 있느냐”는 물음처럼 생각되었다.
그 대목에서 바쁜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정작 지금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묻는다면 나도 선뜻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안정이니 루틴이니 하는 말 뒤에 숨어서 내 안의 열정이 식어가는 걸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설 결말은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폴은 결국 젊고 헌신적인 시몽을 떠나 다시 권태로운 로제에게 돌아간다. 뜨거운 사랑보다는 차라리 익숙한 고독이 더 편했나 보다. 드라마였다면 시몽과 새 출발을 했겠지만, 소설은 독자에게 그런 환상을 주지 않았다.
카페에서 제 책에 집중하고 있는 아들과 커피를 마시는 아내를 보았다. 만화책 못 사서 툴툴대더니 어느새 ‘양심고백’을 읽고 있는 아들 모습과 이 무심하고 평온한 풍경의 크리스마스. 나 역시 폴처럼 이 ‘익숙함’에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1년에 한 번, 이렇게 서로의 취향을 확인하고 책 이야기를 나눈다. 이게 우리가 권태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일지도 모른다.
나도 나중에 누가 "뭐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폴처럼 멍하니 서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구실 구석에서 논문만 뒤적거리느라 나라는 사람 자체가 텅 비어버리는 건 좀 슬픈 일이니까. 무엇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당황하지 않고 내 취향을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 클래식, 오늘은 브람스를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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