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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한 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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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태윤
댓글 0건 조회 5,911회 작성일 18-09-11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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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다들 자신만의 철학, 신념을 갖고 산다. 자신이 사고하고 옳다고 느끼는 틀이 존재하며, 자신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사고에 맞춰 ‘옳고 그름’을 의식적으로 판별한다. 그렇다면 모든 이에게 공통되는 일반적인 ‘철학’은 어떠하며 나는 그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책을 펼치게 되었다.

 내 마음에 가장 닿아왔던 편지는 일곱 번째 편지 ‘이성은 감성의 그림자이다’ 이다. 이 편지는 먼저 마르크스를 내세우며 실천의 중요성을 시작으로 들어간다.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의 괴리라는 것이다. 즉, 하고 싶음에도 절제하고 해야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실천이 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칸트를 통해 지성(인식능력)도 아닌, 이성(욕구능력)도 아닌 ‘감정’을 강조한다. 실제로 칸트는 이성과 지성만으로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하며 감정이 비로소 결합되었을 때 학문적 체계가 완결된다고 보았다. 감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칸트의 주장은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칸트는 왜 감정이 조건에 개의치 않는 성질, 즉 이해관계 없이 그 자체로 자기목적인 성격을 띠는 무관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과 세계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관계가 출현한다고 보았을까. 또한, 실천이 중요하다면 이성과 감정이 충돌이 일어났을 때 과연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일까. 스페인의 생철학자 ‘우나무노’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감정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통해 감정을 가진다는게 얼마나 특별한지 말하려한다. 즉, 인간은 ‘동물적’이라 폄하했던 인간의 감정적(비이성적)이 인간에게 더 어울리는, 다시 말해 인간이 동물보다 더 ‘동물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나무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인간보다 동물이 더 ‘동물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과 동물모두 사고가 가능하기에 하고 싶은 데로 행동할 수 있다. 맛있는 것이 눈에 있으면 먹고 싶어하고 또 먹게 된다. 맛있는 것을 먹는데에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를 통해 내가 존재하듯이 남에게 비추어질 나를 생각하여 몸매 관리를 한다. 이는 즐거움이 눈 앞에 있지만 욕구를 억제하고 먹지 못함으로 인한 고통을 인내했다는 뜻이다.

 생철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니체’를 통해 감정의 중요성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니체는 신 즉 예수가 타살을 당하였는데 타살 이유를 동정이라 말한다. 그러한 동정은 상대를 타인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인간의 자립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니체가 가장 분노하였던 것은 그러한 동정이 아닌, ‘신’이라는 가상적 실재를 이용하여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자들이었다. 니체는 성직자, 학자라는 이들이 이성이 고안한 허구의 성 속에서 성주 노릇하며 대중에게 복종과 인내를 강요하는 비인간적인 처사를 일삼았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본래의 감성적인 의지를 회복시켜 자신의 삶을 독자적으로 개척할 수 있는 길을 찾아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니체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보았다. 내가 이해한 바로 추측해보자면, 본래 감정에서 나오는 동정이 순수한 사랑과 애정으로부터 나오기에 그 사랑이 인간에게 살아갈 힘을 주지만, 그 감정이 과해져 인간이 자립할 힘을 빼앗아 갔다는 것이다. 뿐 아니라, ‘신’이라는 존재로 스스로를 노예로 자처함과 동시에 복종을 요구하는 부정적인 세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한 동정이 아닌 절제된 동정을 통해 삶을 독자적으로 개척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비로소 최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절제된 동정은 하고싶은 것을 어느정도 멈출 수 있다는 말로, 이성이 섞여 있으나, 감정이라는 마음이 밑거름이 되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편지의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이야기가 이성은 감정의 그림자임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니 나는 ‘피노키오’를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물론 합리와 규율의 세계에서 규칙에 대한 지식과 준수가 필수적이기에, 사회가 정해놓은 틀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욕구를 억제해야 하기 때문에 루소의 말처럼 “살기 위해 태어났는데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어간다”고 볼 수는 있다. 유아원,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결혼, 육아 등 사회속의 틀에 자신을 가둔 채 살다 보면 일생에 즐겁게 사는 시간이 굉장히 적은 듯이 느껴진다. 그러나 현재의 재미만이 아닌, 미래를 계획하는 재미, 힘들게 얻어낸 결과물을 통해 생기는 성취감, 타인으로부터의 인정과 칭찬 등 그러한 틀 속에도 즐거움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또한 과연 피노키오의 슬픔은 오로지 놀고 싶어하는 자신에게 노는 것이 나쁘다고 가르치는 피노키오의 할아버지 꾸짖음 때문일 까. 나는 해야 하는 것을 하고 싶은 것을 함으로 인해, 하지 못할 때 오는 슬픔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정받고 남들보다 우월하기를 원하는 욕구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규율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것만을 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으로 다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경쟁과 갈등을 수반하는 사회적 관계에 충실하면서도 즐거운 삶을 어떻게 해야 살아갈 수 있느냐는 우리에게 늘 제시될 문제일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함으로 얻는 즐거움을 가장 큰 우선으로 생각해야 되지만 ‘고통의 인내’가 무서워,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것은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게 되며, 그로 인해 하고 싶은 것 조차 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될 수 있다. 즉, 행복하기 위한 행동이 오히려 행복과 멀어질 수 있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감성이라는 것은 이성이기 이전에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성향이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고 삶을 결론 짓는 것은 뼈와 살이 없는 인간으로 밖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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