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급생 – 프레드 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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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 프레드 울만
이규섭
동급생은 독일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두 소년사이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어쩌면 2차 대전이 가져온 삶의 비극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인공 한스 슈바르츠는 랍비의 손자이자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유대인이다. 중산층 가정에서 나름 평범한 삶을 살아온 그는 어느 날 전학 온 ‘폰 호엔펠스, 콘라딘’에게 매료된다. 인근 지역의 가장 명망 있는 귀족 집안의 자제인 콘라딘은 급우들과는 다른 우아함을 가지고 있었고, 슈바르츠의 노력으로 둘은 친구가 된다. 두 사람의 관계와 시대의 흐름이 병치 되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둘의 우정은 종교적인 관점과 같은 사소한 의견 차이에서 시작하여 그 갈등의 골이 점차 깊어진다. 슈바르츠는 콘라딘과 친해지며 전에 없던 이유로 고통을 받게 된다. 이 우정이 진실된 것인지에 대한 의심과 불안함이 슈바르츠를 계속 괴롭힌다. 슈바르츠는 그의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콘라딘을 만난 이후로 부모를 그에게 소개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부모를 부끄러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또한 부끄러웠다. 이러한 고민은 콘라딘을 집에 초대하고 부모님을 만나게 하면서 현실이 된다. 딴에는 지적이고 교양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아버지가 콘라딘을 보고 ‘백작님’이라 부르며 호엔펠스 가문과 관련된 자신의 일화를 상기되어 떠드는 모습을 보고, 슈바르츠는 지독한 수치심과 모멸감이 들었다. 지극히 소년다운 감정들이 콘라딘과의 관계 이후로 그를 괴롭히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이러한 감정의 골은 콘라딘이 끝까지 자신의 부모를 슈바르츠에게 소개하지 않으면서 더욱 깊어지고, 그것이 콘라딘의 어머니가 유대인을 혐오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끝을 향해 달린다.
둘의 관계가 악화되는
과정에서 나치가 득세하면서 세상의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한다. 학교에서도 유대인을 혐오하는 무리가 생겨나기
시작하고, 나치의 사상이 만연해지기 시작하면서 슈바르츠는 부모의 권유로 미국을 향하게 된다. 그의 부모는 독일에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어(또한, 그의 아버지는 1차 대전에서 훈장을 받았을 만큼 애국심이 강하여) 독일에 남지만, 몇 년이 흐른 뒤 더 이상 독일에서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자살한다. 미국을 향하며 슈바르츠는 두 편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중 한 통은 그를 가장 증오하던
급우가 보낸 저주의 편지였고, 다른 한 통의 편지는 콘라딘이 보낸 편지였다. ‘너와의 우정이 소중했으며 그로 인해 내가 변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다’는
내용과 ‘히틀러라는 남자는 이 나라를 위해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며,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기에 그가 가까운 미래에는 유태적인 요소에서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능력과 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시간이 흐른 뒤에는 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상반된 내용이 담긴 묘한 내용의 편지였다. 친구에
대한 우정, 시대가 주입하는 사상의 사이에서 묘하게 현실을 외면한 채 균형을 잡고 있는듯한 편지는 이전에
콘라딘이 보여주던 그의 태도와 일맥상통하며 슈바르츠에게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20년 뒤 미국에서 자리 잡은 슈바르츠는 옛 학교 동창들의 추모비를 건립하기 위한 기부 요청을 받으며, 세계 대전으로 인해 사망한 인명부를 보게 된다. 자신을 저주했던 아이들의 죽음에 쾌재를 부르면서도, 평범했던 아이들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애써 H 항목(폰 호엘펜스, 콘라딘의 이름이 있을)을 피하던 슈바르츠는 인명부를 찢어버리기 전에 결국 그 이름을 보고 만다.
<폰 호엘펜스, 콘라딘.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 처형>
콘라딘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유대인과 독일인 사이의 우정, 2차 대전, 중편 소설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작년에 읽었던 소설 <수취인 불명>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독일로 건너간 친구가 나치의 사상에 동화되어 배신하고, 배신으로 인해 여동생을 잃은 유대인 주인공은 거짓 암호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친구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으로 복수한다. 평범한 사람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상에 물들어 가는 과정과 그에 따라 상냥하고 정중하던 모습에서 모질고 냉혹한 태도로 변질되는 둘 사이의 관계를 통해 2차 대전이라는 사건의 심각성을 부각시킨 작품이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바다를 건너에 두고 사태의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하던 미국인들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동급생>은 조금 다르다. 외면에 매료되어 관계를 소유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히는 인간의 감정적인 모습과, 젊은 소년의 아름다운 우정과 섬세한 감정을 묘사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이상에 다가간 이후에 드러나는 현실의 괴리를 보여줌으로써, 인간 내면의 솔직한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슈바르츠는 청소년기 특유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자신의 감정을 서술하는데, 콘라딘과의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갈망과 그에 대한 소유욕이 친구가 된 이후에는 두려움과 초조함, 비참함과 서글픔으로 변모하면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정은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 중에서 가장 취약한 형태의 사랑이다.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에 의존하는 연인과의 사랑이나, 피로 이어진 가족 간의 사랑과 달리 순전히 당사자들의 이성과 의지에 의해 유지되는 사랑이다. 담보되는 것이 없는 계약은 그만큼 깨지기 쉽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것이 진실된 것으로 판명되는 순간에 우리는 인간의 의지가 가져올 수 있는 강한 힘을 체감할 수 있게 되고 더 큰 감동과 진한 여운을 느끼게 된다.
미디어가 우리에게 주입한 우정의 이미지는 실현되기 어렵다. “친구란… “ 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많은 격언이 마치 우정이란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존재하는, 그렇기에 서로 의심할 필요가 없는 아주 강한 유대인 양 우정을 포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끈끈하던 관계가 허무할 정도로 쉽사리 깨지는 광경을 수도 없이 보고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담보되지 않는 관계는 그 진위를 파악하기 어렵고, 믿음이 없는 관계는 쉽게 끊어진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영화처럼 극적으로 우리의 우정을 확인할 일이 없다. 나는 내 친구들을 사랑하지만, 그들이 나와의 우정을 확신할 만큼 그들에게 무언가를 줄 기회가 있을지, 그럴 의지가 내게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까지 스펙터클하지 않다. 나는 그들을 남들보다 조금 더 위할 것이고, 그들도 나를 위해 적당히 도움을 주겠지. 그렇게 무언가가 쌓여가면서 오랜 기간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우리는 관계 속에 ‘신뢰’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단계가 오기 전까지 슈바르츠와 콘라딘처럼 우리는 꽤나 많이 그 관계를 의심할지 모른다. <수취인 불명>의 두 주인공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큰 흐름에 의해 그동안의 관계가 덧없을 정도로 틀어질지도 모른다. 확인하고 싶지만, 확인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이상적인 형태의 우정을 갈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뜨거운 것은 우정 자체가 아니라 이상적인 우정의 형태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슈바르츠가 미국으로 떠난 뒤 20년간 콘라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슈바르츠가 떠나기 전 둘의 아름다운 우정을 기억하기에, 마지막 반전이, 콘라딘의 행동이, 둘 사이 우정의 증표라고 자연스레 오해하게 된다. 20년의 세월이 지난 끝에 진실을 확인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비록 그것이 실재하기 어려운 것이더라도, 그 조금의 가능성을 통해 우리는 인간에게서 희망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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