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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반란 - 나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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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태인
댓글 0건 조회 6,341회 작성일 18-04-10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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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반란 – 나무 中


- 베르나르 베르베르 저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작년 겨울, 내게 스며든 한 문장.

 

  짧은 주말의 끝,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늘 일요일 저녁 예배가 끝날 무렵이면 전화가 오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 없이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의 화면을 넘겼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엄마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최근 컨디션 난조로 병원에 갔는데 초기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며, 곧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엄마는 차분한 어조로 다행히 초기라 수술도 크게 어렵지 않아 금방 나을 것이라며 크게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다독였다, 담담히 전해진 소식이었지만, 내 마음 속엔 사뭇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 역시 내 감정을 드러낼 수 는 없었다. 수화기 뒤편에선 분명 아들인 나보다도 당신 본인이 더 힘들어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초기 증상이 없어 진단이 힘든 유방암을 당신이 믿었던 신께서 도와준 덕분인지 빠르게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일까.

 

  평일 오전에 진행되었던 수술은 다행히 순조롭게 끝났다. 전이도 되지 않았고 깔끔하게 수술이 진행되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나는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내뱉었다. 하지만 마취가 풀리지 않은 채 병원 침대에 누워 힘들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속에서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당신의 세 아들이 간이침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혼자 웅얼거렸던 엄마의 모습이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병원 침대 위의 엄마를 보면서 무엇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왔던 것은 ‘엄마도 많이 늙었구나’라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의 나는 엄마가 늙는다는 것을 상상이라도 해 본 적 이 없었던 것 같다.

 

  내게 있어 항상 누구보다도 강한 존재였던 엄마. 하지만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어느덧 나도 독립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고, 엄마도 이제 쉬셔야하는 나이가 되었다.

 

  엄마도 당신이 그렇게 늙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나도 늙는다는 것이 아직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계바늘은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늙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저서 <나무>중 ‘황혼의 반란’이라는 단편소설에서는 우리 사회 속에서 만연한 늙음과 나이든 사람에 대한 인식을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미래 어느 시점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노인 부양에 견디다 못한 젊은 세대 사이에서 ‘노인은 일도 안 하면서 밥만 축낸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퍼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된다. 정치인들과 학자들도 노인 부양 비용 때문에 국가 재정의 근간이 흔들린다고 비난하면서 노인에게 주는 혜택을 점차 없앤다. 식당에서는 노인을 아예 받지 않겠다는 팻말을 걸기도 하며, 더욱이 8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는 약과 치료비 지급을 제한했다. 심지어 자식이 부모를 안락사를 시키는 것이 유행처럼 퍼져 많은 노인들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70대의 프레드 부부는 자신들을 안락사 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뿌리치며 산 속으로 들어가 노인들을 위한 대피소를 마련하기 시작한다. 스스로 먹을 것을 찾고 자신들이 가졌던 경험으로 생존해 나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많은 노인들이 산 속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 노인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노인을 해방시켜달라는 명목 하에 게릴라전을 펼치기 시작하지만, 결국 젊은이들로 구성된 병사들에게 감기바이러스를 맞아 전부 괴멸하고 안락사를 당하고 만다. 프레드가 안락사하기 전 마지막 순간, 그는 주사를 놓는 젊은이에게 “너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 게다”라는 말을 하고 세상을 떠난다.

 

  얼핏 보면 가상의 시점을 배경으로 한 위 소설은 단지 작가의 상상력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 비슷한 양상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다. 이미 많은 노인들이 가족들에게 떠밀려 요양소에서 지내며, 노인을 위한 국민연금과 사회보장제도에 불만을 품는 젊은 세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현재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들은 노화에 대한 맹목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불혹이 목전인 30대 뿐만 아니라, 30대를 앞에 둔 20대들까지 앞자리가 바뀌는 것에 대한 극심한 거부감을 표한다. 모두가 젊어지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나이보다 젊어 보이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스쿨룩’은 어느 새 보편적인 패션의 일부가 되었고, 자연스러운 노화의 상징인 주름은 안티에이징 화장품 또는 보톡스 시술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처럼 여겨지고 있다. ‘동안’이라는 말은 최고의 칭찬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경험과 지식이 중요했던 과거는 그렇지 않았다. 늙는다는 것은 경험이 많다는 증거였고, 그렇기에 행여나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가장 경험이 많은 마을의 가장 큰 어른에게 찾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직 경험이 적은 사람들은 마을의 가장 큰 어른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해결책을 간구했고 그렇기에 그들은 존중받았다. 예전의 늙음은 지금의 늙음처럼 비참하거나 쓸모없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이 세계를 점령하고 4차 산업 혁명을 눈앞에 둔 21세기, 어느새 늙음은 부끄러운 것이고 무능한 것이 되어버렸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1950년대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삐삐가 등장하고 개인용 컴퓨터가 가정에 한 대씩 비치되었다. 그리고 핸드폰이 생기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스마트폰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빠른 변화 속에서 어른들은 매번 새로운 것이 나올 때마다 적응을 해야 했다. 내가 중학생 때 엄마는 나에게 컴퓨터로 어떻게 인터넷 쇼핑을 하는지 물어보셨다. 한두 번은 친절하게 가르쳐 줬지만, 똑같은 것을 물어보는 횟수가 점점 늘어남에 “엄마는 왜 매번 가르쳐줘도 못해?”라고 하면서 짜증을 냈던 기억이 있다. 나이가 있는 사람은 그만큼 경험이 많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10번 이상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세상은 그들이 적응하기도 전에 쏜살같이 지나가버렸고, 이제 세상은 그들에게 만만찮은 것이 되어버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는 사람들은 늘 신제품을 구매하는 젊은 사람들이기에 나이든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되기 때문이리라.

 

  언젠가부터 그들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만지는 것을 더 이상 물어보지 않는다. 어른이라는 자존심과 동시에 자식들이 부리는 짜증에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부모님에게 가르쳐주면서 짜증냈던 그 화와 분노는 도리어 젊은 세대와의 간극을 만들게 되었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는 우리와는 다르게 그들은 전화나 문자 같은 최소한의 기능만을 사용하며 종이신문을 본다. 그들이 조중동 신문을 구독하며 '보수'의 울타리 속에 머물게 된 것은 그들을 무시하고 짜증냈던우리의 응어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수술을 받은 그 날 이후 주말에 자주 집에 가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엄마는 경상도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그 지역의 많은 어르신들이 그러하듯이 보수적이시다. 나와 같은 젊은 세대와 가치관 자체가 아예 다르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특히 정치 얘기를 할 때면 나는 항상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치게 되곤 한다. 하지만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서 내가 엄마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이런 엄마를 미워할 수 없다면, 길거리에 태극기를 들고 탄핵이 무효라고 외치는 어르신들을 내가 미워할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의 갈등의 해결은 이런 발상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늙고 그 과정에서 행동, 생각, 그리고 가치관은 자연스럽게 고착화된다. 우리가 그들에게 짜증내고 배척하는 만큼 그들은 자신들이 영광스러웠던 세대를 회상하며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설 것이다.

 

  모든 사람은 영원히 젊을 수 없다. 우리가 30, 40년 뒤에 지금의 어르신들의 위치에 있을 것이며, 우리가 낳은 자손들도 결국에는 늙을 것이다. 더 이상 늙는다는 것과 쓸모없다는 것이 동의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나이든 사람이 존중 받고 배려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결국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 <은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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