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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크리스토 백작 - 알렉상드르 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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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재환
댓글 0건 조회 5,492회 작성일 18-03-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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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면서 한번쯤은 억울한 일을 당해봤을 것이다. 나에게 있었던 억울한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초등학생 시절의 일화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내가 살던 아파트단지를 연결하는 육교가 있었다. 나는 평소에 점잖은 편에 속하는 학생이었고 가끔 나와 함께 하교를 하던 그 친구는 소문난 개구쟁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는 육교 위에서 차들이 달리는 도로를 내려다보며 여기서 돌멩이를 떨어뜨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말을 함과 동시에, 말릴 새도 없이 정말로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밑으로 던졌다. 아래로 작용하는 중력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돌멩이를 아래로 끌어내렸고 그 돌은 달리던 택시 앞 유리를 깨고 말았다. 그 일로 택시기사님에게 그 친구는 크게 혼이 났고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터졌다. 그 친구가 집에 가서 내가 돌멩이를 던지자고 했고, 내가 던졌다고 부모님께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나는 집에서 아버지께 많이 혼났다. 사실을 설명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겠지만, 흥분한 부모님 앞에서 차분히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설명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나중에서야 나는 엄마에게 사실을 말할 수 있었고, 엄마가 그 친구를 찾아가서 혼낸 탓에 나의 억울함은 풀어질 수 있었다.

  뉴스에서도 보면 항상 억울한 사람과 그 사연이 나온다. 억울하다는 것은 자기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한 채 본인이 입은 손해만을 생각하는 경우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는 누군가의 잘못에 의해 누명을 쓴 사람들의 경우에 생각할 수 있는 감정이 억울하다는 것일 것이다. 누군가의 누명으로 인해 내가 잘못을 해서 형벌을 받는다고 치자. 현실이라면 누명을 쓴 것을 벗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다른 사람의 누명으로 인해 억울함을 겪어봤다면, 굳이 누명이 아니더라도 억울함을 겪어본 사람이면 이 책의 주인공인 에드몽 당테스에 감정이입 할 수 있을 것이다.

  당테스는 모렐 상회 소유의 선박의 선원이다. 그런데 항해 중 선장의 부탁으로 어떤 섬에 정착하여 나폴레옹의 편지를 받게 된다. 하지만 당시 정치의 시대상 때문에 당테스는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모함에 빠져 메르세데스와의 약혼날 잡혀가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담당검사 빌포르는 자신의 가족사를 숨기기 위해 당테스를 풀어주지 않고 감옥에 가둔다. 정치적 연고도 없는 평범한 선원이 한순간 나폴레옹의 복귀를 도우려고 하는 정치범으로 몰려 악명높은 감옥에 수감되어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만난, 감옥에서는 미치광이로 치부받는 신부와 친분을 쌓아 탈옥을 계획한다. 탈옥에 성공후 당테스는 그 신부의 숨겨진 재산까지 상속받게 된다. 신부에게서 각종 지식을 배우고 재산까지 상속받게 된 당테스는 신부의 재산이 묻혀있던 곳 몽테크리스토 섬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이름을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 칭하고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사람들에게 복수하고자 살던 곳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사람들에게 정체를 숨기고 치밀하게 접근하여, 자신이 받은 고통 그 이상으로 복수를 행한다. 당테스를 감옥에 넣었던 파렴치한들은 다들 부와 명예를 얻었고, 빌포르 역시 검찰총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과응보라는 사자성어에 걸맞게 몽테크리스토의 계략대로 죗값을 치룬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즉 당테스가 복수만 한 것은 아니다. 본인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 자신을 아껴주고 감옥에 갔을 때도 빼내주려고 고군분투한 사람이었던 모렐 상회의 모렐씨에게는 감사함의 댓가를 톡톡히 치뤘다. 복수던 은혜갚음이던 모든 일을 마무리지은 몽테크리스토는 조용히 어디론가 배를 타고 떠나게 되는 것으로 이 소설은 마무리가 된다.

  복수를 계획하고 그 복수가 실현되는 모습이 단순하지 않고,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어 이 소설은 흥미를 끈다. 특히나 빌포르 검사가 과거에 당그라르 부인과 낳았다가 버린 그 아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성인이 되어 죄를 지어 법정에서 빌포르를 파멸에 이르도록 한 장면은 내가 꼽는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다. 단순하게 이 소설의 스토리를 정리하자면,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고, 선한 자에게는 상을 내려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오랜 소설, 홍길동전과 스토리 라인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탐관오리를 벌주고, 어려운 사람에게 쌀과 음식을 주는 의적 홍길동과 당테스의 모습이 비슷하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런 행동이 의롭다고 칭송받았을지라도, 현대사회에 이 이야기를 끌고 온다면 당테스에 대한 공감은 감성적인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당테스는 자기 스스로 복수를 행함에 있어, 또 다른 죄를 저지른 셈이고 그것은 양형에 있어 감형 사유에 해당할 지는 몰라도 현대사회에서 또다른 공분을 살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법에서 자력구제를 허용하지 않고 법으로써 단죄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응분에서 비롯된 복수는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는데 있다고 본다. 아마 이 이야기가 소설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정말 현실로 일어났던 일이라면 이것은 또다른 사회의 혼란을 불러일으키며, 당테스는 또다시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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