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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 알렉스 헤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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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재환
댓글 0건 조회 6,731회 작성일 18-03-3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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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본, 국어사전을 찾으면 나오는 뜻은 초목의 뿌리, 사물의 본질이나 본바탕 또는 자라 온 환경이나 혈통을 의미한다. “근본 없는 자식”이라는 욕은 과거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던 표현으로 근본을 중요하게 여겨왔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조상을 기록해 놓은 족보 역시도 이러한 가치관을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일 것이다. 미국 노예제도의 아픈 역사를 생생하게 그려낸 [뿌리]라는 소설 역시 작가 알렉스 헤일리의 조상 쿤타 킨테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이 소설의 제목으로만 보자면 그 내용이 미국 노예 제도를 그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 즉 어린시절 자신의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아프리카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사실에 근거해 재구성했다는 것을 알고 이 소설을 읽는다면 왜 작가가 제목을 뿌리라고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쿤타 킨테는 다른 아프리카인들이 그러했듯 고향인 아프리카에서 납치되어 미국으로 오게 된다. 고향에서는 근본 있는 집안의 자손이었지만 노예 판매상에게는, 그리고 미국인들(백인들)에게 그는 그저 흑인 노예일 뿐이었다. 후대에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백인 주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흑인에게 가혹하게 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쿤타 킨테도 좋은 주인을 만날 때도 있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해주는 잔인한 주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흑인 노예 제도를 기본권적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첫째,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평등권 위반이다. 모든 인간은 천부인권이 존재하며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존엄하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존재할 수는 없다. 오직 나로써만 존재할 뿐인데, 이 노예 제도는 그렇지 못하다. 둘째, 신체의 자유를 심히 침해했다. 헌법은 우리에게 자유권을 부여하는데 그 중 하나가 신체의 자유이다. 하지만 백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물건으로 취급하며 매매를 하였으며, 그들의 일신을 구속하였다. 게다가 그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환경도 보장받지 못한 곳에서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은 지금 사회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전 국민의, 아니 전세계인의 공분을 살 것이다. 아마 공분을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제인권위원회 같은 곳에서 조사에 나설 것이다. 그러나 노예제도가 있을 당시의 미국은 인권에 대한 관념이 그렇게 발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마치 우리가 조선시대 신분사회에서 머슴과 양반이 존재했던 것처럼 말이다.

  흑인 노예 제도는 노예들의 노동력 착취구조에도 문제가 있지만, 노예들의 노동력 공급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이 소설의 쿤타 킨테처럼 아프라카에서 일명 노예 사냥꾼들이 아프리카인들을 기습적으로 잡아갔는데, 이는 요즘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일명 납치이자 인신매매이다. 사람을 시장에서 사고 판다는 것. 그것은 굉장히 미개한 역사이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어차피 근로자들도 노동시장에서 회사에 팔린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노예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노동력을 팔았다고 해서 근로자 개인의 신체를 구속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흑인 노예 제도는 18세기 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17세기는 백인 계약직들이 일을 할 때였는데, 점차 산업구조의 변화가 면서 지역별 경제력 차이가 심해지자 상품작물을 주로 재배하던 버지니아에서 일손의 부족을 흑인노예로 대체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 노예제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미국의 독립 이후에 노예제도는 심해졌다. 백인 주인들의 가사일을 돌보는 정도의 흑인들은 비교적 편한 생활을 했으나, 문제가 된 것은 가난뱅이 백인의 농장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흑인들이었다. 책에서도 보면 쿤타 킨테는 집안의 닭을 돌보거나 집안 대소사를 돌보는 일을 맡아서 하는 주인 집에서는 비교적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었고, 부엌일을 담당하는 노예 벨과 사랑을 키워 가정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청교도식으로 결혼식도 올리고 딸도 얻었다. 그러나 성장한 딸은 팔려갔고 이 단란했던 가정을 깨지게 된다.

  아마 흑인들이 이렇게 가정을 이루게 해주는 것은 노예를 돈들이지 않고 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린 백인들의 교활함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래도 이 때 형성된 흑인 가정에서 요즘의 흑인 문화가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정치, 경제, 기술, 법 거의 모든 영역에서 현대의 미국은 최고를 자부한다. 그러나 분명 이러한 노예제도의 역사는 그들의 큰 오점일 것이다. 누가 더 우월한 민족은 없다. 열등한 민족도 없다. 다 그 자체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백인 주류 사회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탄생한 것을 보면 미국의 의식이 성장한 것 같다가도 미국 우월주위를 이면에 내세우는 트럼프 대통령을 보면 아직 미국의 인권에 대한 인식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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