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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Augustus) – 앤서니 애버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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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민주
댓글 0건 조회 5,099회 작성일 18-01-1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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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Augustus) – 앤서니 애버렛

 

'Imperator Augustus Ceasar Tribunicia Potestas Princeps'

(최고사령관, 존엄한자이자 카이사르의 후계자, 종신호민관 겸 제 1시민)

 

동양 최초의 황제가 진시황(秦始皇) 영정(嬴政)이라면, 서양 최초의 황제는 위에서 언급한 어마어마한 직함을 가진 옥타비아누스가 되시겠다. 동양의 절대권력자를 일컫는 ‘황제(皇帝)’라는 두 글자가 변함없이 현대까지 그 직함이 이어져 내려왔지만, 서양에서는 Imperator가 emperor 혹은 Ceasar가 Kazer(카이저, 세자르 혹은 차르) 같은 간단한 언어로 변형되어 황제라는 의미가 되어 현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 만큼 황제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수식어가 초창기에는 무지 많았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서양의 황제라는 직함은 초창기에는 많은 수식어를 필요로 했을까 의문이 들것이다. 그 답은 최초의 로마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생애와 지중해의 사회적 환경에 답이 있다.

 

중국의 왕 또는 황제, 페르시아의 샤한샤, 이집트의 파라오. 왕을 의미하는 수식어는 서양문명의 시초가 되는 그리스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폴리스가 형성된 시점부터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원시적인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그리스는 로마에 많은 유산을 남겼다. 로마도 처음에는 에트루리아 출신의 왕들이 통치하는 왕정국가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에트루리아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하여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통일하였다. 물론 엄밀한 의미의 공화정은 아니다. 몇몇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귀족 과두정에 가까운 정치형태였으니 말이다. 이에 맞서 평민들은 자신의 권리를 대변해줄 호민관을 내세워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로마의 전통에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런 대립을 공화파(정확히는 소수 귀족)와 민중파의 대립이라고 한다. 카르타고 전쟁이후 자영농들이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귀족들이 토지를 독점하기 시작하면서 로마군의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시민군이 약화되었다. 그라쿠스 형제가 이런 현상을 타파하고자 토지개혁을 시작하였으나 공화파들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마리우스가 군제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결실을 보기도 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렇게 민중파와 공화파가 대립하는 와중에 동방에 원정중인 공화파의 술라가 귀환하여 민중파를 철저히 숙청하면서 권력을 잡았다. 이때 마리우스의 조카와 결혼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혼하라는 술라의 명령을 거부하고 이탈리아에 도망치면서 민중파의 스타로 등극하였고, 이후 갈리아 원정과 루비콘강 도하를 기점으로 로마의 대권을 손에 넣었으나 공화파의 암살에 생을 마감하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독재자를 처단하여 공화정을 수호한다는 의미였으나, 지속적인 이권 감소로 불만이 극에 달한 귀족들의 원로원 최후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후계자로 지목된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겨우 18살이었다. (참고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누이의 손자이다. 절대 카이사르의 조카가 아니다.) 당대의 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키케로나 안토니우스는 18살의 꼬맹이를 만만하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두사람 모두 옥타비아누스를 만만하게 본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와 손을 잡은 안토니우스에 의하여 제거되었고, 안토니우스는 지리멸렬한 내전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때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겨우 30세, 거대한 국가의 권력을 한손에 틀어쥐게 된다. 물론, 양아버지 카이사르가 독재를 펼치려다가 공화파의 반격에 암살당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모든 것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그리고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Augustus (존엄한자)라는 칭호를 선사 받았다. 물론 Imperator (최고사령관)와 Princeps (제 1시민)로 죽을 때 까지 통치하는 체계를 만들어 낸다. 즉, 황제나 왕이 아니지만 실질적인 전제군주정을 펼친 것이다. 공화제의 틀을 유지하면서 은근슬쩍 황제와도 같은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고단수를 실행하여 성공한 것이다. 물론 후세에서는 이때부터 공화정이라고 하지 않고 제정로마라고 칭한다.

어디서 많이 보는 권력형태가 아닐 수 없다. 가까이는 북한과 러시아, 멀리는 중동과 아프리카, 남미의 독재국가들이 가지는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공화제의 틀을 유지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독점하고 세습하는 형태를 완성한 국가는 바로 위에 존재하는 북한이다. 하지만 하는 짓거리를 보면 아우구스투스와 비교하는게 미안할 정도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허울뿐인 원로원이라도 자신에게 가하는 비판을 인내심을 가지고 들었으며, 끝내는 설득과 협상을 통하여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북한은 자신들의 정권에 가해지는 비판에 용서가 없으며, 조금이라고 사상이 불손하다고 판단하면 숙청해버린다. 업적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우구스투스는 군제개혁과, 세제개편을 시행하고 일반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고, 이를 기반으로 200년 동안 이어질 PAX-ROMANA의 기틀을 닦았다. 북한의 김씨 삼대는 자신들의 권력강화를 위하여 온갖 실책을 저질러 국민들이 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겪게 만들었다. 현재도 북한 주민들의 삶의 질에는 관심이 없고, 권력유지를 위한 핵개발과 대륙간탄도미사일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결국 지도자의 마음가짐이 국가의 방향을 결정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비록 공화정을 무력화시키고 실제적인 제정을 열었지만, 기본적으로 대중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던 사람이다. 당대의 기득권인 공화주의자들로는 거대해진 국가를 이끌어 나갈 수 없었고, 근대 이전이라는 시대를 고려하면 제정으로의 진행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다른 형태의 아우구스투스들이 대두되고 있는 추세이다. 소위 ‘스트롱맨’들 이라는 권위주의적이고 독단적인 지도자들이다. 모두들 공화정과 민주주의라는 틀에서 교묘하게 또는 편법적으로 권력을 독점하여 혹은 대중들을 선동하여 국가를 이끌고 있다. 불행히도 이 스트롱맨들은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을 포함하여 러시아 일본까지 존재하고 있다. 모두들 국민들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은 본인들의 권력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으며 권력 유지를 위한 무자비한 탄압도 불사하거나(중국, 러시아), 우경화되는 국민들의 지지를 업고 반대를 묵살하면서 제멋대로 행동하기도 한다(미국, 일본). 그리고 핵개발과 무자비한 숙청을 통해 권력유지에만 몰두하기도 한다(북한).

그리고 더 골치 아픈 것은 이 국가들이 전부 한국을 둘러싸고 영향력을 행사는 국가들이라는 점이다. 지정학적 환경으로 애초에 갈등의 골이 깊은 지역에 ‘스트롱맨’들 때문에 외교 방정식이 더더욱 꼬이게 되어 버렸다. 거기다가 소위 보수라는 자들은 무조건적인 반북와 한미일동맹을 주창하고 있고, 진보라는 자들은 대화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부다 어리석은 주장들이다. 외교에는 정답이 없으며, 때로는 무력이, 때로는 대화가 필요한 것이지, 진영논리에 함몰되어 자기 하고 싶은 말한 하는 자들은 힘의 질서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여기서 아우구스투스에게 배울점이 하나 있다. ‘명분을 주고 명예와 실리를 챙기며, 원하는 것을 관철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인내하고 설득하는 것.’ 우리가 처한 배경과 상황은 다르지만, 정치 9단의 방법은 본받아서 적용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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