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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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랭 드 보통 저
나는 실패를 이겨내는 방법을 누구에게 배운 기억이 없다. 단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방법을 어린 시절부터 배웠을 뿐이다. 열등생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학창시절에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아서 착한 아들로 살았다. 모두에게 좋은 인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어 그들이 바라는 대로 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거나, 실패자로 낙인찍히면 세상이 나에게 등을 돌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패를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크던지 작던지 누구나 실패를 겪는다.
종종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실패했을 때가 있다. 특히 대학원에 와서 연구를 시작한 뒤로 그 실패라는 것이 부쩍 잦아졌다. 한두 번의 실패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다. 다음에는 괜찮을 것이라며 애써 스스로를 달래며 다시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실패가 이어진다면 그동안 기대했던 것들이 엄청난 낙심으로 돌아온다. 성취감이 삶의 원동력인 사람에게 계속적인 실패는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잊게할 만큼 치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모든 것이 싫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지고,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전이라고 말하기에 거창한 몇몇의 사소한 시도들조차 벅차다고 느끼며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나를 자책한다. 내가 살아가는 자부심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다. 완전히 모든 것들을 놓아버리고 싶으며,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아도 별다른 감동을 받을 수도 없다. 긍정이라는 것이 내 몸속에서 전부 사라진다. 성취욕이나 자기만족의 욕구가 채워지지가 않아 식욕과 수면욕 따위의 것들로 대신해서 억지로 우겨넣는다.
다행히 인간에게는 힘든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전자가 탑재되어 있는 모양이다. 서글프도록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은 자신을 깊은 구덩이로 떨어뜨리지만, 이와 동시에 자신과 세상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깊은 구덩이에서 몇 시간을 있다 보면 몇 번의 도전과 그 실패가 (그 도전이 그렇게 거창하고 대단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좌절한 나의 눈에 우연히 눈에 들어온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잦은 실패가 나를 왜 이토록 낙담시키는지, 지금 느끼는 불안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에 대한 단서들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p.21
알랭 드 보통의 글은 자존감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자존감이란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시선이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작용하느냐를 결정한다. 철학자 라캉이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세상에는 자존감이 강한 사람과 자존감이 약한 사람이 있다. 자존감이 강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존감이 없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과 판단에 본인의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느낌
이것이야말로 불안의 원천이다 p.12
또한, 우리가 이토록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타인의 시선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판단을 본인 스스로가 하지 못하며, 타인의 시선에 의해 나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기 쉽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나의 잦은 실패로 오는 낙담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결국 자존감의 문제였다. 하지만 책의 어느 곳에서도 자존감을 강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철학이나 예술, 종교에 눈을 돌려 치유를 받는 것이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이라고 이야기할 뿐이다.
잦은 실패로 인한 좌절의 구덩이에 빠져있을 때에 나를 구해주는 사람이 있다. 어떤 때에는 한없이 나를 지지해주는 어머니이고, 어떤 때에는 여자친구다. 또, 가끔은 언제 통화해도 어색하지 않은 내 고향 친구들이다. 모두 조건없이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다. 몇 번의 실패와 좌절 속에서 자존감은 스스로 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다. 자존감은 주변에서 조건 없이 나를 지지해주고 믿어주는 사람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주는 선물이다. 불안에 몸서리칠 때마다 괜찮다고, 그런 실패가 너의 가치를 망가뜨리지 않을 거라고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낙담한 내가 다시 치유 받을 수 있는 이유다.
나는 실패를 이겨내는 방법을 누구에게 배운 기억이 없다. 단지 지금껏 살아가면서 직접 실패를 겪고 직접 이겨내는 법을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실패를 이겨날 수 있는 방법을 어렴풋이 배울 수 있었을 뿐이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치더라도 무조건 성공만 하는 사람은 없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다. 실패해도 괜찮고 낙담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언제든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 인간의 자존감은 본인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님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를 믿고 지지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실패와 낙담을 통해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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