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만 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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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 저
헬렌 켈러는 생후 18개월 경 열병을 앓은 후 시력과 청력을 잃고 평생 중증장애인으로 살았다. 저자의 이런 사정을 안다면 누구라도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애잔한 슬픔과 절실한 바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읽기에 앞서 나는 눈을 감고 캄캄한 상태로 잠시 있어 보았다. 더불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그런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막막함 이상의 두려움을 주었다. 헬렌 켈러가 극복해야 했던 실제 막막함과 두려움은 아마도 내가 느낀 것의 수천 배는 될 것 같다. 어쩌면 감당하기 어려운 어둠과 정적, 불통이 주는 두려움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이중 삼중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더욱 간절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보지도 듣지도 그러므로 언어적인 소리도 낼 수 없는 사람이 사물을 인지해나가고, 사람들과 의사소통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기적처럼 보였다. 사람이 이루어내는 모든 기적이 그렇듯이 헬렌 켈러의 기적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자신의 노력과 타인의 도움 즉, 앤 설리번 선생이 있었다. 헬렌 켈러에게 설리번 선생은 빛을 준 존재였고 어쩌면 빛 자체였던 것 같다. 그러기에 자신이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무엇을 꼭 하고 싶은지에 관해 쓴 수필에서 그 귀한 사흘의 시간에 제일 먼저 ‘사랑하는 앤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다..’고 적었을 것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줄곧 사람과 사람의 관계, 인연, 운명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책제목과 같은 수필 한 편과 헬렌 켈러가 스물 셋에 쓴 자서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헬렌 켈러가 자신에 대해 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로 하여금 글을 쓸 수 있게 해준 설리번 선생을 더 많이 생각한 것 같다. 헬렌 켈러가 쓴 문장이 아름답고 묘사가 세밀하고 탁월할수록 그녀에게 그런 세계를 열어준 사람에 대한 경외감이 커져갔다. 그런데 세상의 누구보다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를 가진 헬렌 켈러와 그런 그녀를 누구보다 탁월한 사람으로 서게 한 설리번 선생의 관계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잘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헬렌 켈러는 설리번 선생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치더라도 부모, 자매도 아닌 타인이 어떤 이유와 고집과 희망으로 가족도 포기한 사람을 그처럼 키워낼 수 있었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너무도 자본주의적인 사고이겠으나 헬렌 켈러가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으니 풍족한 지원이 평생 지속되었거나 고용관계로 보자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나 보다 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명성과는 달리 경제적으로 곤궁하여 후원금이 필요할 정도였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믿고 의지하고 지원해주는 그들의 관계와 삶이 감동을 넘어 위대하며 장애를 극복한 헬렌 켈러 라는 기적을 낳을 만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가끔 “만약에 …” 라는 가정을 해본다. “만약에 ~라면, 만약에 ~ 아니라면, 만약에 ~ 있다면, 만약에 ~ 없다면…” 이런 ‘만약에 게임’은 현실과는 반대의 더 좋은 상황을 가정해 봄으로써 잠시 행복과 희망을 느끼게도 하고, 더 나쁜 상황을 가정해 봄으로써 현재의 소중함, 가진 것의 귀함을 느끼게도 한다.
이와 비슷하게 헬렌 켈러는 누구나 며칠 동안만이라도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이 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면 그것이 축복일 수 있다고 했다. 어둠은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정적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려줄 것이라면서.
‘만약에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다면..’ 이 조건문은 완성할 필요도 없이 내가 지금 가진 것이 많다는 것, 누리고 있는 것이 많다는 것, 그러므로 이 사실만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또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어 감사하다. 칠흑 같은 어둠과 정적, 그 막막함과 두려움 없이 세상에 살 수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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