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 레디메이드 인생
페이지 정보

본문
< 레디메이드 인생 > - 채만식
이승환 -
“승환아, 왜 대학원 가는 거야?”
“이승환 학생, 대학원 진학을 결심한 동기나 계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친구를 비롯한 지인들이 수도 없이 묻는다. 그때면 늘 발그레 웃으며 수줍게 대답하곤 했다.
“제 꿈은 반도체 공정을 한눈에 바라보며 전체 공정을 어루만질 수 있는 ‘Process Integrator’인데, PI를 할 수 있으려면 학부과정을 넘어선 심화 지식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습니다.”
이런 대답을 자연스레 할 수 있던 시기는 아마 졸업을 1년 앞두고 수년 뒤 장래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는 와중이었던 것 같다. 이전까지는 단지 남들이 하는 것처럼, 사회가 정해놓은 규격에 맞추어 오늘만 살아가는 것에 급급했다. 그렇게 살면 지금 이 순간도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잘 맞추어져 있는 부속품처럼 눈앞에 닥친 현실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만 힘을 쏟았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래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면서 ‘목적의식을 갖춘 상태에서 지식을 습득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끊임없이 탐색했다. 그 결과, 대학원 진학에 대한 나만의 목적을 가질 수 있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싹이 트기 시작하여가지고 한일합방의 급격한 역사적 변천을 거치어 자유주의의 사조는 기미년에 비로소 확실한 걸음을 내어 디디었다. 자유주의의 새로운 깃발을 내어걸은 시민(市民)의 기세는 등등하였다.」
소설 속 ‘레디메이드 인생’의 사회적 배경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인데, 경제 대공황이 흑사병처럼 전 세계를 덮친 암울한 시기이다. 주인공 P는 동경에서 유학까지 하고 온 소위 ‘인텔리’인데, 높은 학력에도 불구하고 취업을 못 하고 있다. 한반도의 모든 문을 닫은 채 쇄국정책만을 고집하던 대원군이 몰락하고 갑신정변 이후 개화의 물결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 물결 속에서 계몽주의가 떠올랐고 이 땅의 모든 사람이 배움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혔다.
「배워라! 배워야 한다. 상놈도 배우면 양반이 된다.' '가르쳐라! 논밭을 팔고 집을 팔아서라도 가르쳐라. 그나마도 못하면 고학이라도 해야 한다.' '공자 왈 맹자 왈은 이미 시대가 늦었다. 상투를 깎고 신학문을 배워라.」
부르주아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지식에 대한 갈증과 열망으로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학업을 탐닉했다. 그 바람에 지식인들이 사회로 와르르 쏟아졌고, 모든 기관이 포화상태가 되어 그들은 원하지 않은 Ready-Made 즉 기성품이 되었다. 이 작품의 저자 채만식 작가는 이런 인텔리와 당시의 시대상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여러 방면에서 비추어 보고 있다. 주인공 P는 현실에 벽에 부딪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다가 이내 자신이 처한 시대와 세상의 문제로 탓을 돌린다. P와 각자의 사정이 있는 미취업자 인텔리 친구들이 모여 창조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전공을 술안줏거리로 삼으며 자조적인 농담과 한탄을 주고받는다. 그러다가 월세도 내지 못하는 처지를 뒤로하고,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외투와 책을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유흥에 빠져든다.
「인테리가 아니었으면 차라리 노동자가 되었을 것인데 인테리인지라 그 속에는 들어갔다가도 도로 달아나오는 것이 99프로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 인테리요. 무기력한 문화 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계속되는 불황 때문에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어중간한 4년제 대학이나 대학원을 가느니 차라리 빠르게 9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게 훨씬 더 낫다.” 같은 말이 오가는 현실과 동경에서 힘든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소설 속의 배경이 중복된다.
한 줄 한 줄 읽을수록 목적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던 과거의 내가 시간이 지나면 저런 모습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시류에 편승하면 군중 속의 일원이 된 것 같아 당장은 든든할 것 같지만, 가까운 미래에 채만식이 소설 속에 그려놓은 풍경과 비슷한 곳에 내가 자리 잡고 있을 것 같아 조금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이러다가 나도 소설 속의 주인공 P처럼 ‘레디메이드’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이내 생각을 바로잡는다.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며 진열장에 늘어선 기성품이 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앞으로 수많은 고난과 역경이 앞길을 가로막겠지만, 여우가 죽을 때 태어난 곳에 머리를 두는 것처럼,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던 당시의 심정을 잊지 않을 것이다. 수구초심의 자세로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삶의 목적을 잊지 않을 것이다.
- 이전글진보와 빈곤(Progess and Poverty) – 헨리 조지 18.03.11
- 다음글(박지원) 신경 끄기의 기술 18.03.0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