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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 스미노 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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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4,999회 작성일 18-02-05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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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 스미노 요루

 

이규섭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곧 경험의 축적으로 여겨진다. 더 성숙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우리는 어른인 양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실 우리는 어른이 되는 법을 제대로 배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깨너머로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운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듯, 우리는 그 본질을 배우지 못하고, 겉모습만을 흉내 내면서 어른으로서 지위를 만끽하는 것으로 스스로가 어른이 되었음을 확인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엉터리 어른들이 가득하다.



 어린아이가 배우는 어른이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다. 어린애와 어른의 경계를 멋대로 나누고 그 문턱을 넘었음을 증명하는 것. ‘애도 아니고’, ‘유치하게’ 따위의 표현과 함께 조소를 날려주면 어느새 상대는 미숙한 사람이 되고, 자신은 그 단계를 넘어선 어른임을 증명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인격체로써 존재해야 할 어른이 그렇게 타인에 의존해야만 어른으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형편없으며, 역설적으로 ‘유치한’ 것인지 왜 모르는 걸까. 그러나 씁쓸하게도 나 역시 그러했듯 꽤 많은 사람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 솔직해지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무엇이 우리의 삶에 더 중요한 것인지 판단하지 못하게 된다.


반에서 과묵한 소년과 발랄하기 그지없는 소녀는 같은 반이라는 것 외에는 접점이 없다. 어느 날 병원에서 소년은 우연히 소녀가 가진 ‘공병문고’를 읽으면서 밝고 활발한 그녀가 실은 췌장의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위로받으며 살고 싶지 않았던 강인한 소녀 사쿠라는 자신의 병을 가족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소년은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않는 속내를 말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비밀을 알게 된 죄라는 명목으로, 사실은 유일하게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사쿠라는 학교가 끝나면 소년을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죽기 전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함께한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엽기적인 제목은 본문에서 사쿠라가 주인공에게 하는 말로 처음 등장한다.


"어제 텔레비전에서 봤거든. 옛사람들은 어딘가 안 좋은 곳이 있으면 다른 동물의 그 부분을 먹었대.

…중략…

간이 안 좋으면 간을 먹고, 위가 안 좋으면 위를 먹고, 그러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소녀가 잠시 입원했다 호전이 되어 퇴원한 그 날, 약속장소를 향하던 사쿠라는 근래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던 강도에게 자상을 입어 죽고 말았다. 허탈하게도 그녀의 죽음은 췌장암과는 연관이 없었다. 그녀가 죽기 전 소년이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 메시지의 내용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였다.


너무도 달랐기에 서로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나 익숙하기에 언젠가 끝날 것을 몰랐다. 끝날 날이 정해졌다고 여겼기에, 끝이 오는 시점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을 잊었다. 마음을 굳게 먹었기에, 슬프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소년은 사랑한다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고심끝에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두 사람만의 문장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말이 단순히 ‘사랑해’의 은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문장이 둘의 유대관계를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둘의 관계가 영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년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고 말했을 것이다. 소녀가 죽더라도 그녀의 일부가 언제나 자신과 함께하기를 바라면서. 소년이 소녀의 삶을 바꾸었 듯, 소녀는 소년의 삶을 바꾸었다. 그래서 소년은 어느새 소녀를 닮고 싶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소녀의 ‘췌장을 먹고 싶다’고 말함으로써, 어쩌면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담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이상의 감정을 담은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한마디 말 때문에 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라기 보다, 유치하지만 아름다운 성장소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는 작가가 서로 다른 두 인간이 어떻게 서로 함께 교감할 수 있는지를 소개하고 싶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소년은 소녀에게서, 소녀는 소년에게서, 서로 제각기 다른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지를 배운다. 그래서 에필로그에서 볼 수 있듯 소년은 소녀를 잃었지만, 결국 그 슬픔을 떨쳐내고 이를 정면으로 마주하고서 딛고 일어난다. 자신이 그녀에게 배운 것을 소중히 간직한채 한 단계 성장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삭막하다. 무채색의 삶 속에서 여기저기 치이던 사람들은 이내 지쳐서 ‘인간관계에 염증을 느낀다’고 말한다. 근래 들어 자주 보이는 ‘혼밥’이나 ‘혼술’처럼 혼자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는 트렌드가 생기는 게 이러한 현실을 방증하는 걸 거다. 나 역시 이러한 삶이 편한 삶이라는 것에 동감하기는 한다.


그러나 우리의 짧은 삶, 100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을까. 후하게 쳐줘도 수십번에 그치는 실패로 우리가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끼는 게 과연 자연스러운 걸까. 우리는 어른 흉내를 내느라 지나치게 세상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힘들어한다는 것은 나쁜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 너무나 다르고 그것이 충돌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해서 이러한 충돌을 다루는 법을 모를 뿐인데, 통계적으로 무의미한 횟수의 경험 따위로 세상을 다 산 것처럼 인간관계를 단정 지어버리는 태도가 옳은지 되돌아보게 된다.



소설을 읽으며 마음 한구석에 유치하다는 이유로 숨겨두었던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함께 살아가고 서로에게 유대를 느낄 수 있다고 나는 기대한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이지 너무 유치했음에도, 소년의 눈물이 더욱 애절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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