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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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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승윤
댓글 0건 조회 5,055회 작성일 17-12-2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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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조선은 민족의 자존과 명과의 의리를 내세워 청에게 저항했다.
1636년 12월 14일, 청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들이 닥쳤다.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도로 가는 피난길이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그 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병자호란은 1637년 1월 30일, 47일 만에 끝이 났다.
전쟁 후 50만의 조선인들이 청으로 끌려갔다.
그해 봄, 다시 민들레꽃이 피었다.


 영화 남한산성은 위의 첫 번째 문단으로 영화의 시작을 알리고, 두 번째 문단을 띄우며 영화를 끝맺는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삼전도의 굴욕으로 잘 알려진 병자호란에 대한 내용이다. 전쟁에 대한 내용이지만 영화는 비교적 차분한 호흡으로 진행되며 어두운 명도의 색과 낮고 무거운 음악을 사용한다. 인물들의 깊은 사색을 나타내는 여러 장치로 관객들이 영화의 전개를 따라갈 틈을 준다.


 본 영화는 영상(영의정)으로 대표되며 자기 살길만 찾으며 문제가 있을 때 남 탓하기 일쑤인 갈대 같은 신하들과 예조판서, 이조판서의 토론을 주요 소재로 다룬다. 조정은 청나라의 침입으로 항시 급박한 상황이다. 전쟁을 불사할 것인가, 적에게 꼬리를 내리고 항복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갑론을박이 오고간다. 청나라의 장수는 칸(황제)이 직접 남한산성으로 오기 전 조선의 세자가 항복을 표하며 오기를 원했지만, 이것을 조선이 받아들이지 않자 점차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였다. 최후에는 조선의 왕이 신하의 예를 갖추어 삼배구고두례를 요구한다. 미래 예측의 어려움과 밝은 미래에 대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처음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상황은 점차 악화되었고 최후에는 종묘사직의 보존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대부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꺾이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지나간 다음에 최초의 결정을 후회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다만 사건의 전말을 아는 후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본 사건의 결말은 분명히 아쉬운 부분이 있다.


 본 글에서는 삼전도에서의 굴욕적인 사건 그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급박했던 남한산성에서의 결정 수렴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묘사하는 조선의 왕은 독단적인 결정보다는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조정 대신들의 중론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쳤다. 실제로 그렇게 행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영화 속 왕의 모습은 꽤나 합리적이었다. 결정할 사항이 있을 때 영상과 예조판서, 이조판서는 각자의 생각을 왕에게 고하였다. 영상은 본인이 먼저 의견을 제시하지 않을 때는 많은 신하들이 동의하는 쪽으로 의견을 굳혔고,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내비칠 때는 사항이 전혀 합리적이지 않아도 무조건적으로 결정을 밀어붙였다. 본인의 자존심이 꺾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상의 행동을 통해 주장의 적절한 근거가 없지만 자존심만 강한 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이가 많건 적건, 요즘에도 꽤나 빈번하게 볼 수 있는 ‘꼰대’의 모습이다.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는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왕에게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는다. 이들의 의견대립을 보다보면 TV프로그램 JTBC의 썰전을 연상하게 한다. 둘의 주장 모두 일리가 있지만 그들의 의견이 다른 이유는 단지 가치관의 차이일 뿐이다. 사건의 전말을 아는 지금 보면 예조판서가 절대로 청에게 머리를 조아리면 안되고, 청의 신하가 되느니 죽는 것이 낫다라고 판단하는 것이 부적절해보일수 있겠지만 조선시대 사대부 정신으로 머릿속이 꽉 찬 그 시대의 문화를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그럴듯하다. 영화를 보며 그 당시 내가 대신이었다면 어떠한 결정을 했을지 생각해보았다. 아마 나도 삶을 선택한 합리적인 이조판서의 의견보다는 예조판서의 의견 쪽에 무게를 두지 않았을까 싶다. 내 생각에 나는 꽤나 합리적이지만, 시대의 문화를 정면으로 배척하는 행동을 선호하지 않는다. 영화 속 시대정신을 읽을 수 있는 몇 가지 문구를 적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그저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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