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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타이거 - 아라빈드 아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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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9,140회 작성일 17-11-1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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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타이거 - 아라빈드 아디가

 

이규섭

 

  지난달 추석을 바로 앞둔 금요일, 마음은 이미 서울로 가있었지만 나는 대전에 남아 리더십 특강을 들어야 했다. 이번 연사는 소설가였다. 그는 혼잣말을 하는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이 리더십 특강이라는 주제에 전혀 맞지 않는 거 같다는 둥,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의아하다는 둥 듣는이의 의욕을 한껏 앗아간 뒤 강연을 시작했다.나 원 참. 뭐 하자는건지.

  분명 지루한 강연이었다. 거의 한 시간 반 동안 자료도 없이 말로만 강연이 이어졌고, 나는 몇 번이고 졸았다. 그럼에도 그의 강연, 아니 그의 이야기에는 강한 메시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지루했던 이야기들이 소설 ‘화이트 타이거’를 읽은 뒤에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작가는 역시 작가인가보다.

  연사의 이야기는 그의 첫 기억에서 시작된다. 이 사회에 위화감을 느꼈던 그 처음의 순간으로. 아무 의미 없이 수많은 학생들을 뙤양볕이 내려쬐는 운동장에 세워두고 교장의 무의미한 훈화를 듣는 것으로 시작하는 학교를 그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교련수업을 납득할 수 없었고, 매일 아침 땡땡이를 쳤다. 그리고 식이 끝날 때쯤 담을 넘어오다 걸려 혼이 났다. 이러한 나날이 반복되자 결국 선생은 그와 타협을 보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리지 않게 들어올 것. 그렇게 그는 아침마다 학교 뒷산에 올라가 운동장을 내려다 보았다. 그는 그당시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아무 의미 없는 시스템과 그 틀을 벗어나는 자들에 대한 처벌,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에 대한 제재와 외면. 그 시스템의 바닥에 있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시스템을 유지하는 선생들조차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수동적이고 타의적인 삶의 형태를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그들은 방향성도 없이 그저 알수도 없는 무언가가 시키는 대로 강경하게 행동할 뿐이었다.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경치가 위에서 내려다 보니 그렇게 뚜렷하게 보이더란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며 어느 곳도 그 풍경과 다르지 않음을 그는 깨달았다. 대학에서도 군대에서도 그리고 사회에서도.

  그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을 그는 한마디로 설명했다.

“제가 바라보는 한국 사회는 ‘하수인’들의 나라입니다.”

  한국 사회의 리더라 불리는 자들 역시 별다를 바 없다고 했다. 그의 시선에서 그들은 ‘리더’가 아니라 ‘리더의 자리에 앉은 하수인’이었다. 이 나라에 리더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 상황에서 리더십을 논할 가치가 있을까?

 그의 가치관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은 잘 겨누어져 있었고, 그 근거가 뚜렷했다. 여러 이야기 중 하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또 다른 하수인을 만드는 것 뿐 이라는 그의 말이 와닿았다. 리더에 자리에 앉은 하수인은 리더로써 무엇을 할지가 아닌 리더의 자리에 집착한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하수인이 기른 또 다른 하수인에게로 계속 넘어간다. 그렇게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는 기묘한 사회는 겉으로 그럴 듯 하지만 속이 곪을 대로 곪아 손대면 무너질 정도로 불안한 상태가 된다.


  소설 화이트 타이거는 한국의 이야기가 아닌, 인도의 이야기다. 인도 사회에 팽배한 불합리한 사회제도와 부정부패, 사회구조의 하위층에 스며든 역겨운 노예근성, 그리고 그것들이 얽히어 만들어진 그 끔찍한 삶의 연쇄고리를 작가는 수탉장이라 불렀다.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그 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속박되어 한사람의 인간으로 살지 못하는 불쌍한, 또는 어리석은 삶을 현실적으로 묘사했다.

  주인공은 이름조차 없는 인도의 하위층 계급의 사람이었다. 카스트제 하에서도 그는 그저 과자를 굽는 사람에 해당하는 직업이었고, 자본주의가 스며든 작금의 인도에서는 그마저도 강탈당해 인도사회 가장 어두운 면에 자리한, 사회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그런 계층에 속해있었다. 그러나 그는 영리한 사람이었고, 마음속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대단한 성공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는 조금씩 나은 일자리를 찾아가게 되었고, 기회를 잡아 부유한 저택의 운전사 일을 잡게 되었다.

  그는 충실한 하인이 되었다. 그의 목적은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 뿐이었다. 저택에는 두 명의 운전사가 있었다. 그는 주 운전사가 되어야 했다. 그는 주 운전사가 가진 흠을 이용하여 본인이 그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그리고 얻은 그 자리에서 그는 주인과 함께 이리저리 함께 다녔다. 그의 주인은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엘리트였지만, 지주의 아들이었던 탓에 결국 인도로 돌아와야 했다. 주인이 결혼을 약속한 정혼자까지 포기하면서 해야했던 일은 유력한 정당의 정치인에게 뇌물을 가져다 바치는 일이었다. 주인공은 주인을 모시고, 혹은 모시지 않고 계속해서 돈을 나르는 일을 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 지 중요치 않았다. 그는 몰랐던 것이 아니라 외면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야 제대로, 분수에 맞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화이트 타이거였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주인이 어째서 괴로워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그 순간이, 그 감정이 그가 느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는 이내 깨닫고 만다. 주인을 연민하면 할수록,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면 할수록. 끝내 그는 주인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돈을 모으고 모아 주인의 눈을 피해 좋은 옷을 입고, ‘금발’의 창녀를 안기 위해 거금을 써서는 스스로 절대 향하지 않던 사창가를 향했다. 자신의 주인이 그러했듯.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자신이 주인과 같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금발의 창녀는 가발을 쓴것이었다. 주인은 그를 연민할 뿐이었다. 그는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불쌍하고 가엾은 도구 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언제나 혐오하던 하위 계층의 역겨운 노예 근성이. 사악하지 않은 나약함이 가져오는 지저분함이 이내 온 몸에 스며든 것을 깨달아 버렸다. 그는 자신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꼈고, 이 사회의 불공평한 제도에 혐오감을 느꼈으며, 이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부패한 정부와 하위계층의 어리석음에 혐오감을 느꼈다. 그는 이 수탉장과 수탉들에게 더할수 없는 혐오를 느꼈다. 그렇게 그는 비가 내리던 그날 밤. 그가 입에도 대지 않던 술- 그 술병으로 주인의 머리를 세 차례 내려쳤다.

  그는 그렇게 주인을 죽인 뒤 도망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엉망진창인 나라의 제도가 그를 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수배전단 속의 그의 모습은 어느 인도인을 빗대어도 될 정도로 의미가 없었다. 그는 도망쳤고 썩을대로 썩고, 허술할대로 허술한 그를 억압하던 사회의 시스템을 그대로 이용하며 회사를 세우고, 안락함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금 소설의 첫머리로 돌아와 인도를 방문하는 중국의 총리를 향해 당신이 얻어가고자 하는 그 대단한 인도의 산업에 대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알려준다는 서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인도 전체를 향해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면서.


  고속성장으로 뒤틀린 한국의 사회구조보다 더 봉건적인 사회구조를 자랑하는 곳이 바로 인도 아니던가. 카스트 제도로 대변되는 인도의 계층은 비록 이제 더 이상 카스트 제가 남지 않았더라도 그만큼이나 절대적이고 구속적인 구조로 자리하고 있다. 결국 주인공 역시 제 몸 하나만 건지고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인도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며 자조하는 이 소설은 이 사회 전체의 구조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개발도상국이 가진 어두운 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소설이지만, 그 안에 드러난 인간 사회의 역학관계는 보편적이다. 각자의 이권을 얻기 위해 달려드는 약육강식의 사회안에서 누군가는 승리하고 누군가는 도태된다. 누가 파이가 무한하다 했던가. 한정된 자원을 공유하는 한 그곳에는 경쟁이 존재한다. 결국 강한자의 작은 편리함을 위해 약한자의 큰 고통은 당연한 것이 된다. 강한자가 늘 악한자가 아님에도 이러한 구도가 우리에게 친숙한 이유다. 긴 완력싸움의 마지막에 약자는 스스로의 당연한 권리를 강탈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합리화해야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소설 속에서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계급에 맞추어진 삶을 살고 맞추어진 사고를 하고 있다. 그렇게 살아야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도 견딜 수 있기 때문일까. 주인공이 스스로 수탉이 되기를 거부하는 장면이 끊임없이 생각난다.

  책을 읽다보면 인도 사회가 직면한 상황은 절망적이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은 그저 안좋은 상태를 넘어 악순환이 반복될 때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언제나 두 방향에서 이루어져야한다. 세상의 뛰어난 사람들과 시간의 흐름에 의해 사회의 부조리와 시스템의 억압에 저항하는 정신은 조금씩이나마 눈뜨고 있다. 그러나 수탉장이 부수어 진들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여전히 수탉이라면 그곳은 울타리만 없다뿐이지 여전히 수탉장이다.

  다시금 서두로 돌아가서, 지난 강연의 연사는 마지막에 스스로가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부탁한다는 말로 지루한 강연을 마쳤다. 화이트 타이거는 스스로 튼튼한 수탉장에서 벗어난다. 부조리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그 정도의 존재다. 그러나 그 화이트 타이거마저 결국 꼬일대로 꼬인 인도의 현실을 바꿀 여력은 가지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아직 부족한 점 투성이지만 그래도 이제와 다시금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은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 안에 멍청한 수탉들이 가득하지 않기를. 나 역시 더 깨어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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