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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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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태인
댓글 0건 조회 5,791회 작성일 17-12-1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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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로드

- 김물길 작가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 시절의 인문계 고등학생이라면 대부분의 학생이 그렇듯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와 보충수업을 들었다. 그 날의 첫 수업은 국어 시간이었다.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지만 국어 시간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학 작품은 온전히 작품 전체를 읽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고 그랬을 때만이 그 작품이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설 일부를 잘라내어 교과서에 싣고, 더군다나 그 소설의 일부조차도 하나하나 나누고 분석하는 학교의 수업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것은 흡사 주방장이 맛있게 만들어놓은 탕수육을 탕수육 안에 있는 고기와 탕수육 튀김, 그리고 탕수육 소스와 채소를 하나씩 나누어 따로 먹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날의 국어 시간은 나에게 특별했다. 선생님께서는 보충수업 교재 대신에 프린트 한 장을 복사해 오셔서 학생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셨다. 그때 보았던 시는 바로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이었다. 나는 여느 수업과 마찬가지로 이 시도 반복법이니 역설법이니 하는 어쭙잖은 방법으로 시를 해부하고,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소화해나가는 그런 수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날 국어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수능을 위해서 문학을 분석하고 최대한 많은 양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은 지금 교육정책 상 어쩔 수가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너희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최근에 내가 본 시 중에서 가슴에 와 닿는 시가 있어 너희들에게 소개해주고 싶다. 시라는 것은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비록 수능 때문에 시를 공부하지만, 수능이 끝나고 대학에 가서도 가끔 시를 읽고 느끼는 학생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시를 읽어 주셨다. 나의 시선은 프린트보다는 시를 읽으시는 선생님에게로 향했다.

 

 

<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그날의 반짝이는 선생님의 눈동자와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안도현 시인의 시가 내 마음을 울렁거리게 해서도 있지만, 이 선생님께서는 시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진짜 문학이 좋아서 국어 선생님이 되셨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억으로부터 10년이 지났음에도 이 기억이 생생하게 나는 것은 오롯이 선생님의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이후로 어떤 일을 하든지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열정’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열정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묘한 끌림과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열정을 가진 사람과 같이 지내다보면 혹은 열정을 가진 사람의 강의나 강연을 들으면 나도 어느새 그 영향을 받게 된다. 내가 수능을 마치고 대학에 와서도 이따금 시를 읽는 버릇을 가지게 된 것도 고등학교 선생님의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인 것처럼.

 

   그래서 나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한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열정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해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동기가 부여되고 의욕이 샘솟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 중에서 이미 성공을 해서 기반을 갖춘 사람보다는 아직 도전 중이며 현재진행형인 사람, 특히 내 나잇대의 또래를 볼 때 더욱 설레고 가슴이 뛴다. <아트로드>의 저자 김물길 작가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스물 네 살의 그림을 전공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저자는 대학에 들어가서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의 워크캠프에 참석하게 된다. 그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색다른 경험을 하였고, 이를 계기로 그녀는 세계여행을 결심한다. 여행 자금을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 꼬박 2년 동안 인턴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돈을 모아 673일, 약 2년 동안 세계여행을 떠났다.

 

  아트로드는 아시아에서 시작해 아프리카, 중동, 유럽, 중남미를 거쳐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여정이다. 먼저 이곳 미얀마에서 시작해 서로 인접해 있는 태국, 라오스에 머물다가 인도에 좀 오래 머물면서 장기 여행을 위한 근육을 키우기로 했다. 이어서 일기장에 아트로드의 규칙을 적었다.

  첫째, 보고 느낀 것을 매일 그림으로 그린다.

  둘째, 그림 재료는 최대한 현지에서 조달한다.

- p.19 <아트로드>

 

   김물길 작가가 사랑하는 그림과 여행,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아트로드’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여행 자금을 아끼기 위해서 수천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하며, 무료로 숙박할 수 있는 사이트인 ‘카우치서핑’을 통해 숙박을 해결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조금씩 진행해 나갔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지만, 충분한 사전 조사와 대비, 그리고 열정으로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김물길 작가가 여행하면서 그렸던 약 400여 장의 그림은 놀라우리만큼 창의적이다. 그녀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일상에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것들을 새롭게 관찰할 수 있는 시각이 생긴다.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서식하는 파란 발을 가진 새를 보고, 파란 발에서 푸른 바다를 떠올린 그녀의 감수성이 놀랍다. 그녀의 그림들이 더욱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창의적이고 신선한 그림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것을 완성할 때까지의 스토리와 열정이 녹아 들어갔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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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발을 가진 새 'Blue-footed Booby' | 출처-김물길 작가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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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 guevara, cuba, havana newspaper | 출처-김물길 작가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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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묵칼레의 눈물' | 출처-김물길 작가 블로그

 

 

   김물길 작가의 삶을 보면 나와 비슷한 또래임에도 용기 있고 실행력이 강하며 열정이 가득한 것 같다. 그녀의 행보를 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열정을 주는 동시에 나에 대한 부끄러움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나의 대학원 생활의 주제인 ‘반도체’는 내가 대학교 4학년 초반에 들었던 ‘반도체 공정’ 수업의 교수님의 열정으로 인해 탄생한 것이다. 소자의 스케일링에 따라 한계를 맞이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이야기하시는 교수님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그 열정을 보고 이게 진정한 엔지니어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한계에 부닥칠 때마다 색다른 방법들로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는 반도체 엔지니어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고, 이것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하지만 대학원에 들어오고 나서 어느 순간부터 이런 열정은 점차 작아졌던 것 같다. 문제를 해결할 때에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좋아서 했던 연구가 지금은 단지 좋은 결과와 실적을 위한 연구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반성을 이 책을 통해서 하게 된다. 김물길 작가 본인도 돈이나 명예보다는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홀로 떠나지 않았던가.

 

   ‘죽은 물고기만이 강물을 따라 흘러간다.’라는 말처럼 열정이 없는 사람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어떠한 열정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은 남을 움직일 힘이 없다. 나는 남을 움직이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제 자리에서 묵묵히 버텨내기 위해서 혹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지느러미를 움직이는 물고기처럼 오직 열정이 있는 사람만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런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으며,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또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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