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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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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충선
댓글 0건 조회 5,880회 작성일 17-10-1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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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젊은 시절 살인에 취해 살아오다가, 어느 순간 사람을 죽이는 것을 그만두고 입양한 딸을 키우면서 살고 있는 한 살인자가 있다. 적어도 그의 기억속에서는 그렇다. 그는 삼십 대 중반 한 문화센터의 직원을 대상으로 마지막 살인을 범한 뒤에, 딸을 살려달라는 희생자의 말을 지키겠다고 약속하고 그녀의 딸을 거두어 들인다. 이후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쉴 새 없이 들끓던 살인에 대한 욕구가 점자 사라졌다. 그의 표면상의 직업은 수의사였고 그의 집 뒷마당에는 대나무숲이 있었을 만큼 재정적으로는 넉넉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의 살인은 단 한번도 경찰의 수사망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치밀했고, 문화센터에서 배운 짧은 경력만으로도 정식 시인으로 등단할 수 있을만큼 표현력도 뛰어났다. 허나, 이제 노인이 된 그에게 문제가 하나 새겼다. 기억을 잃는 병, 뇌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속에 점점 구멍이 뚫려가는 알츠하이머라는 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알츠하이머가 걸린 시점에서 소설 속의 살인자는 삶에 대해서 미련 가질 것이 없었다. 삶을 이어나갈 환희를 느끼게 해 주던 살인에 대한 동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단지 한가지 그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오래전에 입양했던 그의 딸을 보살피는 것 뿐 이었다.


   알츠하이머라는 무형의 도둑은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빼앗아 간다고 한다. 살인자는 이 도둑과 싸우기 위해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습관들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생각들과 행동들, 중요한 일들을 메모지에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집안 벽에 붙였다. 벽에 붙여진 메모지가 하나 둘 늘어나 벽을 가득 채울 정도가 되었다. 메모로는 모자란 지, 딸은 아버지가 말을 할 때마다 녹음을 할 수 있도록 녹음기를 선물해 주었다. 그의 말과 행동들은 그의 머리 속이 아닌 벽에 붙여진 메모지와 녹음기에 저장되었다.


   어느 날, 녹음기와 메모지에 의지해 현재를 자각할 수 밖에 없게 된 그에게 큰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에게는 자신의 생존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다. 그의 딸에게 자기와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남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그가 봤을 때 딸의 남자친구는 확실히 살인자였다. 딸을 죽이기 위해 계획적으로 접근한 놈이었다. 어떻게든 기억의 끈이 남아있을 때 이 놈을 죽여야 했다. 기억의 끈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결과적으로 그의 필사적인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딸의 남자친구는 멀쩡히 살았고, 그의 딸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그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충격적인 반전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딸의 죽음을 수사하러 온 경찰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당신의 딸이 아니며, 치매에 걸린 당신을 도와주러 온 요양보호사인데 당신이 목 졸라 죽였다고. 거기에 더 충격적인 이야기까지 덧붙여 들려준다. 그가 지금까지 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문화센터 직원이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같이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소설은 감옥에 갇힌 살인자가 마지막 기억의 끝을 놓으면서 마무리된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나는 왠지 멍한 느낌이 들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작가가 이것을 의도했는지는 몰라도, 너무 급작스러운 반전 전개에 마치 내가 치매에 걸린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살인자의 1인칭 시점에서 쓰여진 소설이기 때문에, 살인자의 기억이 더 사실 같아 보였고, 갑자기 경찰에 의해 등장하는 반전들의 논리에는 꽤 커다란 여러 구멍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소설이 반전을 강조하는 평범한 추리소설 중 하나였다면, 개인적으로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평범한 반전소설과는 다르게 뭔가 길고 찝찝한 여운이 남았다. 그 여운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이 소설은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제목은 보통 글의 내용 전체를 함축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소설은 ‘기억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살인자는 세상을 기억하는 ‘기억법’을 점차 자신의 머리가 아닌 메모와 녹음기에 맡기게 된다. 그가 현재를 인식하려면 자신이 작성해 둔 메모를 보거나 녹음기에 녹음해둔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인식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보통 알츠하이머 환자가 아니기 때문에, 머리속에 저장해둔 기억으로 현재를 인식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억들이 그 순간의 개개인의 기분이나, 혹은 자라온 환경, 가지고 있는 경험들에 따라 같은 상황이라도 다르게 기억될 수 있다. 같은 상황에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날 때, 두 사람 사이에서는 혼란이 발생한다. 마치 살인자의 관점에서 책을 다 읽어 나가다가 경찰이 말하는 실제 사실을 접하는 독자처럼.


   저자는 책에서 명확한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살인자는 기억을 완전히 잃을 때까지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어쩌면 저자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알츠하이머가 아닌 우리라도, 우리의 경험과 기억으로 바라본 현실을 너무 확신하지 말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자의 기억속에는 사실이라고 확실히 믿고있는 사실이 다른 누구에게는 아닐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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