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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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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민주
댓글 0건 조회 6,154회 작성일 17-08-25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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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는 전라남도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신안군에 팔금이라는 섬 출신이고, 학교는 육지에 있는 목포에서 다녔다고 한다. 1980년 어머니가 고3인 시절 광주에서 시민들에 의한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그 결과는 매우 참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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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도시는 광주 하나밖에 없어서 줄 곧 광주로 놀러 다니곤 했던 고3의 엄마는 1980년 5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말했다. 계엄군이 투입되기 전 주에 (5월 11일), 주말에 광주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버스를 타고 목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나주 근처를 지났을 즈음에 버스에서 군인들이 산자락으로 이동하는 걸 봤다고 했다. 늘상 있던 훈련이라고 생각하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친구들이랑 고등학교 근처에 있던 하숙집에 돌아왔다고 했다. 엄마 친구는 부모님에게 군인들이 이동하는 걸 버스에서 목격했다고 말했고, 당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던 친구의 아버지는 “공수 부대원들이 돌아다는 것이 분위기가 살벌하니 당분간 주말에 놀러다니지 말고 목포에 있으라.” 고 하면서 신신당부 하였다. 하지만 역시 청소년 시절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모님의 말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것’이 정석이었기 때문에, 5월 17일에도 엄마를 비롯한 친구 두명은 광주로 또 놀러 갔다고 한다. 물론 계엄군이 투입되는 사건이 터지기 전날이라 별 일은 없었지만 분위기 만큼은 살벌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금성산인가 망산에 올라서 놀려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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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무엇이냐면 이 산들이 광주랑 나주 사이에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정황상 계엄군이 광주로 진출입을 하는 모든 도로를 하나씩 차단하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여고생 두명이 정신없이 산놀이를 할 무렵에 딸이 없어진 걸 안 엄마 친구의 아버지는 여고생 3명이서 광주 근처 산으로 놀러갔다는 말을 듣고 냅다 산으로 그 두명을 찾으러 다녔다고 했다. 결과론 적으로는 다행이도 두 사람은 아버지에게 빠르게 발각(?)되어 질질 끌려가다 시피 집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 때를 회상하며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 “아저씨가 늦게 오거나 계엄군이 일찍 우리 봤으면 험한 꼴 봤을 걸?” 이라고 하셨다. 물론 우리 아버지는 그런 상상도 하기 싫은 이야기 하지도 말라고 질색하신다.

 

그렇게 친구 아버지에게 체포(?)되어 목포로 끌려간 엄마는 18일 자정을 기해서 계엄령이 전국에 내려진 것을 뉴스를 통해서 들었다. 그리고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한 대학살이 일어난 후 5월 31일인가 6월 1일이었을 것이다. 계엄군이 물러난 후 기회를 틈다 광주로 놀러간 엄마는 자전거를 타면서 도로 곳곳에 무언가 웅덩이가 진 것을 봤다고 했다. 처음에는 비가 와서 빗물이 고여 있었는 줄 알앗는데, 자세히 보니깐 빗물이 고인게 아니라 핏물이었다고 한다. 그제서야 사태 파악이 된 것이다. 계엄군이 모여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다닌 것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엄마는 하숙집으로 돌아와서 본걸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뉴스에서는 전두환의 통제를 받은 언론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폭도들이 광주를 장악해서 계엄군이 탈환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광주의 참상을 본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서 분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뉴스로만 소식을 접하는 사람들은 택시운전사에 나오는 다른 지역 사람들처럼 “진짜로 폭도들이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켰나?” 라고 반신반의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진짜 폭동이 일어났다고 굳게 믿은 사람들도 많았다. 엄마가 이런 현실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 5.18 운동 1 년 뒤 서울에 올라와서 지하철을 탔을 때라고 한다. 당시 지하철을 처음 타본 엄마는 모든 것이 신기해서 지하철만 타면서 내릴 생각은 없이 이리저리 환승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 때 한 이야기가 들려 왔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옆에 있는 노인이랑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야기 하는 말이 북한에서 빨갱이나 내려와서 폭동을 일으킨게 맞다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런 소리를 들은 엄마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 노인에게 대뜸 따졌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직접 본거 맞아요? 그거 간첩이 저지른 일이 아니고 계엄군이 그냥 와서 시민들한테 마구 총을 쐈다니깐요.”

 

“뉴스에서 그러는데 폭도들이 내려와서 폭동을 일으킨던 진압하다가 군인들 사상자가 났다는데 어디서 거짓말이냐?”

 

“답답한 양반이네. 공수부대가 나주에서 광주로 이동하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봤고, 그 날 이후에 광주에서 온 거리가 피바다가 된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뉴스에서 거짓말 하고 있는거 모르느냐?”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줄 모르고 지하철에서 한참을 싸웠다고 했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그 때만 생각하면 여전히 화가 나서 눈물이 날 정도라고 했으니, 듣는 나도 우리 엄마가 잘 싸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그 광경을 보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화 초창기의 만섭(송강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배불러서 시위를 하는 것이다.” “고생해 봐야 저런거 안하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진실이 하나 둘 씩 드러나면서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고, 결국 6월 항쟁으로 신군부를 끌어내리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면서 민주화를 달성하였다. 만섭과 같은 생각을 가지던 사람도 진실이 드러나면서 생각이 바뀌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6월 항쟁에서 전국적으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러고도 의식이 과거에 갇혀버린 사람들이다. 택시운전사가 개봉하자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5.18은 폭동이라는 망언을 내뱉었고, 극우들은 북한군의 소행을 사실이 아닌것으로 왜곡한다면서 법원에 상영금지 신청을 했다가 광속으로 기각되었다. 물론 전두환 회고록은 판매 금지 가처분을 받고 인세까지 몰수당하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으니 자업자득인 셈이다.

 

하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관점과 상식에서 이해 할 수 없는 행동들을 보이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 답답하다. 상식적으로 군인들이 자국민들을 향해 사격을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군대의 의의는 국가가 외적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기 위한 물리적인 수단이지, 국민들을 억압하는 수단이 아니다. 제대로 생각이 박힌 군인이라면 시민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항명을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아직도 일제의 잔재가 남아서 무조건적인 상명하복이 미덕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불의한 명령 까지 군인이라고 지켜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 일개 말단 사병이었다고, 명령이라 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그저 책임 회피를 위한 변명일 뿐이다. 스스로를 도구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어떠한 형태로든 항거를 했어야 했다. 물론 당시 분위기상 제대로 항명하지 못했을 점은 참작할 만하다. 하지만 독일이 70년이 지난 지금도 나치에 부역했던 말단 사병까지 찾아내 단죄하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단죄 할 수 없다면 죄책감이라도 지고 살게해야 한다. 그런 죄책감도 없는 뻔뻔한 자들은 자손들에게 평생 외면받고 손가락질 받다가 쓸쓸한 인생을 보낼 것이고, 국민들에게는 저주를 받으며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역사책에는 유신 시절로 회귀를 원하던 극우 세력으로 나치와 다를바 없었다고 서술되어 대대손손 손가락질 받으면서 기억될 것이다. 치워야 할 적폐가 한둘이 아니다. 극우의 본산이 되어버린 자유한국당을 지방선거와 총선으로 몰락시키고, 4.19 및 5.18 정신을 훼손하는 제정신이 아닌 극우세력을 법의 심판을 내려 단죄해서 체질을 바꿔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누구의 말처럼 개돼지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는 것이다.

 

5.18 당시 진실을 전달하려면 告 위르겐 힌츠페터를 비롯한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던 루모어 및 여러 기자들과 희생자들을 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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