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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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식이 없는 사람과도 손쉽게 친분을 맺을 수 있는 요즘, 21세기에 등장한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는 나와 비슷한 분야에 일을 하고 있는 사람,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친목을 도모하여, 우리의 관계망을 넓혀주는 강력한 소통의 도구와 같이 보인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이 어느 시대와 비교하여도 네트워킹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외와 단절은 더욱 선명해져 보인다. 물리적인 한계를 넘어 늘 함께 있고, 제약을 받지 않고 언제든 대화를 할 수 있어 보이지만, 정작 우리가 머물 공간은 점차 소멸되어 간다. 형식적인 만남만 늘어날 뿐 머무름이 줄어든 시대 속에서, 우리는 무분별한 연결의 확장이 관계의 깊이를 보장하지 않음에 대해 생각을 해볼 필요가 다분하다.
“ 우리가 삶을 짧게 느끼는 것은,
우리가 가진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낭비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이야기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 같다. 나 역시 그 체감에 동의하는 바이고 중·고등학교 시절과 지금을 비교해 보았을 때, 같은 총량의 시간을 보냄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은 빨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빠른 산업의 변화에 발맞춰 살아가는 우리에게 체감되는 시간의 속도는 나이가 아니라 우리의 태도가 바꾼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2007년, 아이폰이 대중을 충격의 도가니에 몰아넣고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명사를 갖는 전자기기가 출시되어 보급되었으며,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등장한 다양한 매체 플랫폼의 확장은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고 신속하게 지낼 수 있게 해주었지만, 우리는 유리 디스플레이 화면 속에 점차 잠식 되어가기 시작했다. 이동 중, 손 한 뼘 남짓한 화면 속을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대다수는 화면 속에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고 나 역시 그 안에 갇혀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토록 디지털의 세계에 집착하고 스스로를 가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하여, 지루함을 회피하고 시간을 활용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기 부지기수다.
“음악은 음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음표와 음표 사이의 침묵 안에 있다.”
우리는 지루함이라는 감정을 굉장히 낭비적인 요소로 착각하고 사는 듯하다. 약간의 여유가 생기거나 생각의 공백이 생기는 찰나를 견디지 못해,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켜고 손가락과 눈을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지루함을 피해 취한 것은 알맹이 하나 없이 1분 남짓한 영상일 뿐이다. 우리는 지루함이라 감정, 낭비되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집어든 것이 아니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쾌락을 찾아 들어간 것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깊은 사색이나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가 아닌, 끊임없는 콘텐츠의 파도에 몸을 내어 기꺼이 휩쓸리기를 선택한 것이다.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선택한 도파민의 과잉 공급은 시간의 밀도를 옅게 만들고, 사유할 만한 유의미한 경험의 부재와 사고의 과정이 담기 않는 기억은 시시각각 휘발되어 사라진다. 결국 지루함이라는 틈새를 메우기 위해 자극을 찾아 헤맨 우리의 행위는 스스로를 마취시켜, 진정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우리의 시간을 지루함으로 치부하면서 반납한 행위였던 것이었다. 그렇게 지루함은 사라진 듯 보였지만 한 켠에는 공허함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실없는 시간의 흐름만 지나고 난 이후이다.
무분별한 친목 도모를 위해 그리고 지루함을 피해 뛰어든 디지털의 매체. 그로 인한 공허함을 피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머무름으로써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멈춤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러할 용기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타인의 일상을 훔쳐보는 시선을 거두고, 오롯이 나 자신과 마주하는 고독의 시간을 기꺼이 허락해야 한다. 그렇게 머무름의 진정한 의미를 체득할 때, 지루함에 대한 채워야 할 공백이란 오해를 거두고 공허함과의 의미의 차별점을 뉘우치고 날 때, 비로소 소외와 단절이 선명해진 시대 속에서 우리의 하루가 의미 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사유와 감각의 시간으로 하루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다짐을 시작으로 옹골찬 삶의 무게를 되찾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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