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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아 - 어느 시골 의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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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태인
댓글 0건 조회 5,364회 작성일 17-07-12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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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아-어느 시골의사 이야기 >

 

글 – 존 버거, 그림 – 장 모르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빙하기가 온 지구에서 마지막 생존자들이 설국열차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얼핏 보면 열차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앞칸과 꼬리칸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존 전쟁을 다룬 작품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사회를 잘 반영해놓은 작품이다. 물과 전기를 얻기 위해 열차는 끊임없이 순환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문제가 생긴다. 열차의 작은 부품들이 마모되기 시작했지만 이를 대체할 부품을 설국열차 안에서는 만들 수 없었다. 한 가지 가능한 방법은 사람이 직접 그 부품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어른은 몸집이 컸기에 부품을 대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열차의 기관장인 윌포드는 부품을 대체할 만한 어린아이들을 꼬리 칸에서 데려다 부품의 역할을 하도록 한다. 아이들은 열차가 돌아가는 내내 부품으로서 작동한다.

    

   감독이 어떤 목적으로 이 장면을 넣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무심코 넘어갈 수 있는 장면이었지만 여기서 현대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계층 구조 아래에서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각자가 부품이 되었다. 부품이 된 개개인의 노력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이것은 개인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설국열차의 머리 칸 사람들은 부품의 역할을 하는 아이들을 단순히 부품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설국열차가 결국 멈추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 아이들은 부품으로서의 역할을 하다가 몸집이 커지면 버려져 종국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리라.

    

   우울한 이야기이지만 대부분의 사람 역시 사회를 이끌어가는 부품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가장 똑똑하고 건강할 시기에 취업해서 열심히 일하지만, 부품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면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다. 새롭고 젊은 부품이 끊임없이 들어오기 때문에 정년이 되기 전에 ‘명예’퇴직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만들어내어 정당한 것처럼 보이도록 해고를 시킨다. 문제는 그들이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이다. 온종일 부품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살았기에 원래 하던 일 말고는 다른 일을 할 줄 모르고 할 수도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항상 뒷전에 놓고 사회가 원하던 것만을 추구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다양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존재이다. 글을 쓰고 읽고, 음악을 듣고,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다. 좋아하는 운동을 할 수도 있으며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갈 수도 있다. 어떨 때는 친구의 실연을 들어주는 존재였다가 다른 때는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존재가 된다. 지구상의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인간은 단순히 본능에만 충실한 존재가 아니며 먹고 사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이러한 인간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 – 부품으로서의 역할 - 이외의 다른 것들을 잊으라며 강요받기도 한다. 철저하게 부품의 역할만 하라는 것이다.

    

   누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뉴스에서 종종 보도된다. 특히, 카이스트 학생이 자살했다는 뉴스가 1년에 한두 번은 들린다. 어떤 사람들은 머리도 똑똑하고 학벌도 좋은 학생들이 왜 그렇게 목숨을 끊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조금만 넓고 길게 보면 한순간의 힘듦일진대 왜 그렇게 쉽게 목숨을 끊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은 늘 좋은 성적으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그리고 사회가 원하는 성적을 받고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힘들게 들어온 대학교에는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잘난 사람이 많다. 더 이상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가치는 ‘공부’와 ‘성적’이었는데 이것이 부정당해버리니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사회가 부여한 가치를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가치로 착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안타깝게 목숨을 끊은 대학원생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결과가 쉬이 나오지 않는 연구의 특성상, 더군다나 폐쇄적인 공간에 있는 대학원생들이기에 더욱 그러한 감정을 많이 느끼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의 부품이어서는 안 된다. 자기가 맡은 분야만 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총체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 사회가 강요하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이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했을 때 가슴이 뛰는지 알아야 한다. 매년 노벨문학상의 후보로 거론되는 존 버거는 ‘인간의 삶을 허비하게 만들고, 인간 개개인의 위선을 심화시키며, 점진적으로 인간 자체를 황폐하고 공허하게 만드는 현대사회 속에서 과연 ‘총체적 인간’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시골의사인 존 샤살(John Sassall)에게서 그 해답을 찾았다.

    

   존 버거의 글과 장 모르의 사진이 담긴 <행운아-어느 시골 의사 이야기>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하여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모든 것이 낙후되어있는 시골의 의사인 존 샤살은 단순히 환자의 아픈 부분만을 진찰하는 의사가 아니다. 그는 환자와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이 사는 이야기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다. 또한, 환자에게 이전에 치료받았던 곳은 괜찮은지, 잘 나았는지에 대해서도 물어본다. 환자의 아픈 부위만 진찰하고 처방하는 의사가 아니라 한 사람을 온전히 한 인간으로 직시한다.

    

   시골 의사 존 샤살은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를 ‘온전한 하나의 인간’으로 파악하려고 하며, 그 역시 총체적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한다. 환자가 어디가 아프다며 하소연하는 것을 그냥 듣고 처방만 하는 의사와는 달리 그는 환자를 마음에서부터 공감한다. “압니다, 압니다. 나도 꼭 그렇게 아팠던 적이 있었습니다.”라며 환자를 위로한다.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한다. 그는 말한다. 매일 진료실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은 다른 환경에서 자라 다른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기에 그 어떤 환자도 똑같은 증상을 가진 이는 없다고 말이다. 의학적인 관점에서 진찰해주고 처방해주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환자를 다양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글을 읽고 있으면 그의 따뜻함이 책을 넘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듯하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몇몇 젊은이들은 초기에 그 이상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보기에 많은 의사들이 환상을 깨고 냉소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그러한 이상이 엷어졌을 때, 자신이 다루는 환자의 실제 삶의 가치에 대해 확신할 수 없기 되기 때문이다. 이는 성격이 둔하거나 비인간적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인간의 삶의 가치를 알아볼 능력이 없는 사회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행운아-어느 시골의사 이야기 중>

    

   이따금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갈 때가 있다. 혼자 산지 오래 되었기에 아프면 서러울 때가 많다. 그럴 때 무뚝뚝하고 기계적인 어투를 가진 의사의 정확한 진찰보다는 괜찮다는 따뜻한 말과 미소가 더욱 위로가 될 때가 많다. 이렇듯 작가 존 버거는 샤살이라는 시골의사의 삶을 통해서 존 버거는 우리에게 자본주의의 열대우림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인간을 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으로 보는 사회는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환자와 아픔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샤살의 행동은 효율만을 추구하는 현재 사회와는 다를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이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이다. 비단 의사 뿐만이겠는가. 어떠한 일을 하든지 사람과 사람이 공감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절실한 때이다. 요즘 감정을 죽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슬픈 영화를 보아도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새로운 곳에 여행을 가도 감정이 움직이지 않으면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소위 말하는 ‘스펙(Spec)’이라는 단어가 제품의 성능을 뜻하는 ‘Specification’의 약자가 아니라 다양함을 일컫는 ‘Spectrum’의 약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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