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
페이지 정보

본문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저
-신이 된 인간, 우리가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얼마 전 뉴스에서 웃지 못 할 해프닝 하나를 보도했다. 새 차, 그것도 독일 B사의 신형 모델을 일시불 완납으로 구매한 구매자는, 딜러로부터 이미 꿈에서는 몇 번이나 몰아봤을 그 신차를 인수받았다. 곧이어 구매자는 딜러가 동승한 채로 본인의 집 지하주차장에서 자동주차 기능을 사용해본다. 급박한 상황에서는 브레이크도 자동으로 밟힌다며 차주를 안심시키려는 딜러와는 달리 차주는 불안해한다. 연신 내뱉은 딜러의 괜찮다, 믿어보라는 말에 끝내 차주는 버튼을 클릭하고 엔진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너무 똑똑한 나머지 창의적인 주차를 해버린 탓일까, 차의 앞머리는 이내 굵직한 기둥의 모서리 향해 맹렬히 돌진하고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 둘은 기계의 인공지능에 굴복해 깊게 탄식한다.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아니 누구에게 이 사고의 책임이 있을 것 인가. 완전치 못한 기능을 믿으라며 차주의 귀를 팔랑이게 한 딜러? 아니면 어찌됐든 버튼을 누른 차주? 그것도 아니라면 에러율 0% 도달 이전에 제품을 출시한 독일 B사? 이 사고와 연관된 그들은 누구의 책임인가를 판별하기 위해 법적 공방을 이어나가겠지만, 「호모 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바로 인간 모두의 책임이라고 간단히 말한다.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류는 지금 전례 없는 기술의 힘에 접근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우리 대부분은 그 기술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시에 우리 대부분은 이 기술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예측 할 수 없게 된다고.
인공지능은 인간의 인지능력을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 컴퓨터가 인간을 대신해 자동차를 운전하고 질병을 진단하는 것은 물론, 머지않아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까지도 인간보다 더 잘 해낼 수도 있다. 컴퓨터가 직업시장에서 수많은 인간들을 밀어내고 거대한 규모의 사회·경제학적 측면에서의 ‘쓸모없는 계급’을 만들어낼 때 복지국가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게다가 생명공학은 인간의 수명을 대폭 연장하고 인간의 몸과 마음을 업그레이드할 것이다. 이러한 기술 발전의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전례 없는 생물학적 기술적 빈부격차를 목도하게 될 것이고, 성능이 향상된 초인간, ‘호모 데우스’와 평범한 인간 사이의 격차는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격차보다 더 클 것이다.
호모 데우스의 호모는 사람을 뜻하는 학명이며, 데우스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신이라는 뜻이다. 즉, 호모 데우스는 ‘신이 된 인간’이라 번역할 수 있으며, 이는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주요 키워드를 간결하게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라는 행성을 정복한 사피엔스의 다음 종을 저자는 신이 된 인간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신에게는 불멸과 창조의 능력이 있듯이 우리 인류는 지난 시기 인류를 괴롭히던 기아, 역병, 전쟁 등을 보기 좋게 (거의) 진압하고, 이제껏 신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불멸, 행복, 신성’의 영역으로 다가가려 한다. 하지만 그 속도는 너무 빠르고, 그 물결은 거세서 개인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 물결은 소수의 호모 데우스들이 이끄는 것이라 모든 이들이 평등히 누리진 못할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뱃머리가 끊임없이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호모 데우스를 신이라 믿는 종교적인 발상의 힘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아주 먼 과거, 문자가 없어 무언가를 기록할 수 없었던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이 남긴 유물, 그림과 같은 것에서 그들의 삶을 추적한다. 문자가 없을 때에도 인간과 항상 함께 했던 것은 바로 종교이며, 그들의 믿음은 그림, 유물, 유적 등에 나타난다. 아주 먼 과거의 믿음은 토테미즘에 가깝지만, 대상으로의 믿음 역시 보이지 않는 끈을 만들어 사람들을 질서와 유대 속에 살게 했다. 농업의 발명으로 사피엔스는 자연을 개척하고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었는데 많은 수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우상숭배가 필요했다. 우상숭배는 소수의 지도자가 수많은 피지배계층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으며, 집단행동을 빠르고도 효과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정신적 결속력을 제공해주는 수단으로써 작용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시대를 바라본다면 과학기술 및 경제의 발달이라는 거대하고도 집단적인 행보가 이리도 효율적이게 진행될 수 있는 정신적 결속을 제공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경제 성장에 대한 집착은 새로운 인본주의의 교의다. 이에 대해 저자는 경제 성장은 지구라는 한정된 자원 앞에서 제로섬 게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세계 모든 곳에서 당면한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해주는 구원자로 여겨지며 끝내는 종교적 지위를 획득했는데, 특히 요즘에는 장기적 성장을 확보하는 특정 형태의 자본주의가 인정받음에 따라 탐욕스러운 재벌, 부농, 표현의 자유가 보호받고, 생태환경, 사회주의 전통가치들은 해체되고 파괴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인류는 생존투쟁의 다음 수순으로 ‘불멸, 행복, 신성’을 꿈꾼다. 이런 목표를 추구하게 되면 궁극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부분에 속할지도 모르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눈을 크게 뜨고 오늘 우리가 내리는 선택이 우리를 이끄는 곳이 어디인지 보아야 한다. 개인의 힘으로 역사의 진군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암전 속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이 서늘한 경고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경제성장과 생태계 안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정치인, CEO, 유권자들의 십중팔구는
성장을 선호한다. 21세기에도 그런 식이면 우리는 파국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 파국을 막을 브레이크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만일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밟는다면 경제가 무너지고 그와 함께
사회도 무너질 것이다. 만에 하나 성장이 멈춘다면, 경제는 포근한 평형 상태에
안착하는 것이 아니라 추락해서 산산조각 날 것이다.
자본주의가 불멸, 행복, 신성을 추구하라고 우리를 부추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대를 망치로 깨부순 니체처럼 '자유주의'라는 시스템이 지배하는 현대의 세상이 '데이터교'라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환 될 것이라고 파격적인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논리는 매우 신선하고도 설득력 있다. 네안데르탈인이 멸종되고 사피엔스로 진화한 것과 같이 사피엔스의 호모 데우스로의 진화과정은, 니체가 당시 중세가 얼마나 비효율적인 시스템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역사, 철학, 종교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고 패턴을 발견했던 것처럼 저자도 현대의 시스템의 비효율성을 역사, 철학, 종교, 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 뒤의 발견한 패턴을 근거로써 주장하기에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유전자 과학과 신경과학, 빅 데이터 그리고 인공지능 등의 새로운 과학이 그 어떤 속도보다 빠르게 대다수의 인류를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잉여로 전락시키고, 자원을 획득한 지극히 소수의 인류가 신의 지위에 오르게 될 것임이 자명하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대다수의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알고리즘과 빅데이터가 만들어내는 알고리즘과 관련된 무엇을 가진 소수가 될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
- 이전글언어의 온도 17.06.08
- 다음글소박한 자유-아흐메드 카스리다 17.06.0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