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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 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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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5,245회 작성일 17-07-12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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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 주희

이규섭

 

  자고로 군자란!

 

  소인은 한가롭게 홀로 지낼 때는 선하지 않은 행동을 거침없이 행하다가 군자를 보면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자신의 선하지 않은 행동을 가리고 선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것을 진실로 마음속에 있는 것은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 홀로 있을 때에도 신중하게 행동한다.

 

  “몸을 닦음은 자신의 마음을 올바로 하는데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분노가 있으면 마음의 올바름을 얻을 수 없고, 두려움이 있어도 마음의 올바름을 얻을 수 없으며, 좋아하고 즐거워함이 있어도 마음의 올바름을 얻을 수 없고, 우환이 있어도 마음의 올바름을 얻을 수 없음이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군자는 어떤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를 조선왕조 500년간 그리고 그 잔재가 100년가량이나 우리 시대를 지배해온 유교 사상은 정확히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 기원전 중국 땅에서 시작된 학자의 통찰력은 인간 본성을 어디까지 꿰뚫어 본 것일까?

  한국 사회는 유교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유교’라는 단어 자체에 거부반응을 보일만큼 강한 반발을 보인다. 유교 사상 아래서 자리잡아온 여러 폐해들이 현대사회의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와 권리 상당수를 저해하는 잘못된 악습으로 작용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일반 백성에 해당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사서삼경을 필두로 하는 유학의 경전들을 독파하며 탐구하였을리 만무하니,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유교사상은 모두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제정된 예법과 형식에 의해 각인된 것이라 보는 것이 옳다. 예법과 형식을 기반으로 한 문화들은 그 자체로 자연스레 유교의 핵심 가치를 내제하고 있을 수 있으나, 온전히 학문의 내용을 담고 있지는 못하기에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본연의 가치가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유교 사상 전체를 시대착오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구시대의 산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그 본연의 가치와 그것이 추구하던 이상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이다.

  대학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덕은 근본이고 재물은 말단이다.

  근본을 도외시하고 말단을 일차적인 것으로 여겨 추구한다면 백성과 이익을 다투게 되니 이익을 쟁탈하는 가르침을 베푸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국가를 이끌어가면서 경제에 힘쓰는 것은 반드시 소인에게서 나온다. 소인에게 국가를 다스리게 한다면 재앙과 해악이 함께 이를 것이다. 어진 사람과 있다고 할지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국가는 이익만을 추구함으로써 이익을 창출하지 않고 의로움을 추구함으로써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라는 의미이다.

 

  재물은 부수적인 것이니 소인에게 맡기어도 큰 문제가 있는 부분이 아니다. 사람이 모여 살아가는 국가가 안정되게 운영되는데 있어서는 국가 자체가 해야할 본연의 역할이 있다. 그러므로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될 것이 아니라 본연의 역할(의로움)을 수행함으로써 내부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연히 이익을 창출할 수 있게끔 하라니. 기원전 사람들의 사상이라기에는 굉장히 선진적이지 않은가! 따라서 거를 내용은 과감히 거르고 순수하게 옛 선인들의 지혜를 엿보고자 사서의 시작으로 안성맞춤인 대학을 골라 들어 읽게 되었다.

  대학은 유교가 제시하는 철학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는 책이다.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의 이론을 설명한 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원리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그저 천하를 평정하는 단계를 열거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수신/제가의 단계 사이에 다음과 같은 현실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자신의 집안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닦아야 한다”라고 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친근히 여겨 좋아하는 대상에 치우지고, 멸시하며 싫어하는 대상에 치우치며,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대상에 치우치고, 가여워 불쌍히 여기는 대상에 치우치며, 오만하여 소홀히 여기는 대상에 치우친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대상에게서 그 단점을 발견하고, 싫어하는 대상에게서 그 장점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드물다.

 

  그리고 몸을 닦는 것이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으로 확장되는 것이 이후 평천하에 이르게 되는 것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설명을 더하고 있다.

 

<강고>에 어린아이를 보살피듯이라고 하였다. 마음으로 진실되게 구한다면 비록 적중하지는 않더라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진리를 구하는 것은 억지로 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마리를 알게 되면 그것을 확장해갈 뿐이다.

  유교가 우리 사회에 미치 수많은 병폐 중에 최악을 꼽으라면 바로 예로부터 이어져온 형식적인 것에 지나치게 구애 받게 한다는 점이다. 그중 나이와 지위에 따른 엄격한 위계질서는 그 기득권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본질보다 형식에 무게를 두어 본래 의도한 바와 다르게 변질되어 버렸다. 다음의 내용을 보면 불리할 때만 장유유서니 군사부일체니 효니 떠드는 사람들이 어떤 과를 범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나아가 직장상사나 선배 같은 앞서 지나간 자들를 비난하면서 본인도 똑같은 절차를 밟는 사람들, 사회를 좀먹는 병폐를 되물림하는데 일조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어떤 점을 간과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임금이 백성들에게 인자해야 한다고 명령하면서 임금 자신은 난폭함을 좋아한다면 이는 임금이 백성들에게 병력한 것과 임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상반된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임금이 자신들에게 인자하라고 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신에게 있은 후에야 다른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고, 자신에게 없은 후에야 다른 사람을 비난 할 수 있다. 자신에게 간직된 것을 미루어 나아가지 않고서 다른 사람들을 깨우쳐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중략)그러므로 군자에게는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어서 헤아려보는 도’가 있다.

  자신이 아랫사람의 위치에 있을 때 윗사람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며, 자신이 윗사람의 위치에 있을 때 아랫사람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윗사람을 섬기지 말라.

 

  그동안 나에게 동양철학이 사이비 느낌을 강하게 주는 이유가 있었는데 이는 책의 서술 방식에 기인한다. 자신의 철학을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철학서들과 달리 유교의 책들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 한자로 쓰여있기에 각 글자가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 의도가 달라지고, 많은 문장으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의미를 넘겨짚어 해석해야 한다. 선인의 말이나 시를 인용하여 설명하는 방식으로 각 장에서 설명하고자하는 개념을 은유적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점도 문제다. 진리라는 것이 명확히 설명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방식의 기술이 더 책의 목적에 부합할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비유적 표현과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유교가 제시하는 근본 내용을 소인(‘군자’가 아닌 자)로 하여금 잘못된 해석을 유도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받아온 교육의 영향이든, 나이 들면서 동양철학에 빠진 분들이던 이런 분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옛 사람들의 책을 읽을 때 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인간이 시대를 거치면서 쌓아 올려나가는 부분의 것은 옛사람이 오늘날의 사람만 못하다해도,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본성에 관한 옛 선인들의 통찰력은 경의롭고 신비하다. 세월이 흘러도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언급되고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사상도 지나간 하나의 흐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그보다도 먼저 시작된 동양의 철학들도 한번 들여다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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