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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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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충선
댓글 0건 조회 4,870회 작성일 17-03-14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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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
울리히 슈나벨 지음/김희상 옮김

가끔씩 이공계생이 아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면 이해가 안된다며 질타를 받기는 하지만, 중학교 시절의 나는 어려운 수학문제를 푸는 일에 푹 빠져있었다. 잠이 많은 때 였음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를 앞에 두고 낑낑대며 새벽까지 씨름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고,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쉽게 구하기 힘든 올림피아드 문제를 찾아다니기 위해 학교 내에 수학올림피아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찾아 문제를 구걸해오기도 했다. 그렇게 받아온 수학 문제를 풀기시작하면, 그 수업시간이 어떤 수업시간이던 간에 나에게는 수학 시간이 되어 버리곤 했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냈다는 그 성취감, 그리고 ‘수학 잘 하는 아이’로 인정받는다는 그 짜릿함은 계속해서 나로 하여금 수학 문제에 몰입하게 했던 원동력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다 보면, 가끔씩 신기한 경험을 하곤 했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풀다가 종종 ‘에라 모르겠다’ 하고 엎드리면 곧 잠이 드는데, 신기하게도 잠에서 깨면 몇 시간동안이나 보이지 않던 풀이 기법들이 생각나 문제가 풀리는 것이었다. 한 두 번이 아닌 여러 번 반복 되는 현상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잠을 자면 꿈속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문제를 푸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었던 기억이 있다. 그로부터 15여 년이 지난 지금, 드디어 이러한 현상에 대한 원인을 독일의 저명한 과학 저널리스트인 울리히 슈나벨이 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 이라는 책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플로리다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한 가지 실험을 수행한다. 실험 참가자에게 6분 동안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며 그때그때 떠올린 것을 적어보라고 하면서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어떤 경우에도 백곰은 생각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거듭 의식을 비집고 들어오는 백곰을 몰아내려고 참가자들은 의지력을 쥐어짜야 했다. 그런 다음 어려운 퍼즐과 같은 문제를 내어주면, 백곰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다른 실험 참가자들에 비해 이들은 훨씬 더 빨리 문제 풀기를 포기했다. 바우마이스터는 이러한 의지력이 일종의 '힘 저장고'와 같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의지에 따른 행동을 하는 동안 우리는 그 저장고에 담긴 힘을 끌어다 쓰는 것이다. 이 저장고가 바닥이 나면 우리의 의지도 무너진다. 이렇게 의지가 무너질 때, 바우마이스터가 "자아 탈진" 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나타낸다. 혼자 힘으로 거의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하며, 중요한 것을 그렇지 않은 것과 구분하는 게 엄청나게 어려워진다.

 

저자는 이렇게 외부의 자극에 휘둘리는 탓에 분명한 생각을 할 수 없으며 늘 산만함이라는 만성적인 질병과 같은 상황에 시달리는 사람은 의지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끌어 모아 휴식을 누려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독일 심리학자이자 두뇌 연구가 에른스트 푀펠은 그저 지친 것일 뿐인지 아니면 정말 휴식을 가져야만 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간단한 법칙을 제시한다. 하루를 마친 저녁 시간, 조용히 홀로 앉아 오늘이라는 시간을 다시 떠올려보며 무언가 창의적인 것을 한게 있나 자문해보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창의성이야 말로 침착하고 평온한 성격의 사람이 갖는 가장 중요한 지표이다. 그저 주어진 일만 처리하며, 주도적으로 이끌기보다 끌려 다니는 일에 익숙한 사람은 그만큼 절박하게 휴식을 필요로 한다."

 

이 대목을 책에서 읽어 내려가면서, 현재의 내 모습을 내면의 거울에 비춰보았다. 나에게는 창의적인 힘이 남아 있는가, 주어진 일만 처리하면서 끌려 다니는 모습이 실제 나의 모습이 아닌가. 뿌옇게 먼지가 껴서 형태를 겨우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거울 속에서 어린 시절 하나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면서 희열을 느껴가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쏟아지는 외부의 자극에 휩쓸려 희미해져 가는 삶의 불빛에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 하는 내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명성있는 사회학자인 로자는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기에 죽기 전에 될 수 있는 한 많이, 그것도 무한히 많이 채워 넣으려 시도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급속도로 퍼지는 현대 사회의 가속화의 흐름에서 우리들은 스스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 채 한 배를 타고 떠내려가고 있다. 시간에 쫓기며 많은 일을 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전형이 되고 말았지만, 이렇게 될 수 있는 한 풍족하게 살고, 많은 성과많을 찾아 헤메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며, 창의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주범이 되었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러바인은 '인생 속도'에 따라 각 나라들의 순위를 매기고, 여러 흥미로운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예를 들어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은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국가'의 주민에게서 확연히 높게 나타났으며, 흡연, 음주, 마약 중독, 운동 부족 등과 같이 건강을 해치는 습관 역시 '속도가 빠른 도시'에 훨씬 더 넓게 퍼져 있었다. 또한 이러한 가속화 사회는 만성 스트레스, 번 아웃 신드롬, 공황장애, 수면장애, 우울증 등의 신종 질환들의 발생 빈도를 급격히 증가시켰는데, 대다수의 환자들은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그것도 심판하거나 예단하지 않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상대방을 가졌다는 느낌" 만으로도 대단한 도움을 받았다. "자아 탈진"이 된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당신 정말 잘 하고 있다고 어깨를 다독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휴식과 같은 효과를 오로지 그 순간만이 좋아 그 순간에 충실히 몰두하는 시간에서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건이 존재하는데, 가속화 사회에 해야 할 것이라는 외부의 자극들에 찌들어버린 어른들이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무한한 창의성을 보여주는 아이들을 보고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은 아이를 보고 본받기보다 어린아이를 갖은 의무와 과제의 촘촘한 틀 안에 얽어매기 일쑤다. 조기교육, 영어과외, 미술, 음악 등 나중에 화려한 경력을 쌓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아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요한다. 그러나 아동은 원래 차고 넘쳐날 정도로 창의적이다. 스스로 도전을 찾아 나서며 흔쾌히 몰입에 빠지는 명수이다. 바로 그래서 아이를 모범으로 삼아 그 속도에 맞춰줄 필요가 있다.

 

저자는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고방식의 변화라고 설명한다. 끊임없이 무슨 일을 해야 성공하며 더 많은 돈을 벌고 더욱 그럴싸한 결과를 낼까 노심초사하는 대신에 이 논리를 거꾸로 돌려 지금 여기에서 우리 인생을 온전히 즐기려면 어떤 성공, 얼마나 많은 돈, 무슨 위신이 필요한지 되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흐름’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몰입’은 어린아이처럼 바로 지금 하고 있는 행위에 빠짐으로써 주변의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해주는 행복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때 시간은 그 어떤 의미도 잃고 만다.

 

단지 수학문제 푸는 것이 좋아서 밤 새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던 15년 전의 나처럼, 과연 나는 다시 몰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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