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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 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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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태인
댓글 0건 조회 5,975회 작성일 17-05-1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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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한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반면 교묘하게 꾸며진 거짓말을 한다는 것, 상반된 두 가지 의견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 모순되는 줄 알면서 그 두 가지를 다 믿는다는 것, 논리를 전개해서 논리를 반대하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그것을 거부하는 것,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고 믿으면서 당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잊어버릴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이고 잊어버리고 필요한 때는 재차 기억 속에 끌어들였다가 다음에 다시 잽싸게 잊어버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과정 자체에다 그와 같은 과정을 적용하는 것. <소설 1984 中>


   이중사고(doublethink)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중사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중사고란 한 사람이 상반된 두 가지 신념을 가지며, 동시에 그 두 가지 신념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소설 <1984>에서는 이러한 이중사고를 당의 구성원들에게 주입한다. <1984>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나라인 오세아니아는 다음과 같은 강령으로 당을 지배하고 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소설 1984 中>


   당은 신(神)과 같이 절대적인 존재인 동시에 무오류의 존재로 군림하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서 당은 과거의 역사를 끊임없이 수정하고 반복한다. 예를 들어 기존에 당이 제시한 경제적인 생산량이나 정량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고 하자. 그러면 당은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기록을 바꾸어버린다. 기존에 제시했던 목표치를 낮추거나 그 목표 자체를 없애버린다. 그리고 국민에게 바꾼 목표가 진실이었다고 말하며 이것을 믿도록 강요한다. 바뀐 과거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 행위이며 이에 대해 일언반구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당은 끊임없이 과거를 바꾼다. 그렇기에 당의 지배 하에 있는 모든 사람은 변하는 과거를 끊임없이 받아들이며 이중사고를 한다. 모순적인 사실이 있더라도 당이 주장하는 모든 말에 대해서 긍정하고 받아들인다.


  날마다 그리고 거의 매 순간마다 과거는 현재가 되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당이 발표한 모든 예언은 문서상으로 옳다고 증명되고, 그때 필요하지 않은 뉴스 항목이나 의견 표출은 기록상으로 절대 남겨지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필요할 때마다 다시 쓰는 양피지와 같은 것이다. <소설 1984 中>


   소설에서만 등장할 법한 이러한 이중사고는 현대 사회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 국가인 일본에서는 명백한 기록과 사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안부에 대해 자신들이 잘못한 일이 아니라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이에 대한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잘못된 역사를 국민들에게 주입함으로써 자국민들이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도록 만든다. 과거의 사실을 은폐하고 바꿈으로써 자신들이 했던 행동을 합리화한다. 분명 자신들이 잘못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들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중사고를 하는 것이다. 비단 일본뿐이겠는가. 얼마 전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었던 국정교과서도 같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중사고와 무지는 다르다. 무지는 어떠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지만 이중사고는 어떤 사실을 인지함과 동시에 정반대의 사실 또한 믿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회사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성희롱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직장 내 상사가 여사원에게 치마가 너무 짧다고 얘기했을 때, 이것은 충분히 성희롱이 될 수 있는 발언이다. 이 경우 상사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성희롱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그것은 무지의 경우이다. 반면 상사가 이런 발언이 성희롱이라는 것을 생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본인의 행동에 대해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경우가 바로 이중사고이다.


   모르는 것은 알고 배우면 고칠 수 있다. 하지만 이중사고를 하는 사람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최근 우리나라만 보아도 그렇다. 나는 대선후보들이 토론하는 것을 챙겨보는 편이다. 대선토론을 볼 때면 어찌 저렇게 뻔뻔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하는지 한숨이 나올 때가 많다. 북한과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후보에게는 아직도 빨갱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른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를 이 지경까지 만든 ‘그 당’임에도 불구하고 빨갱이와 좌우논리에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이 아직도 많다는 것이다. 독재정치의 북한을 그토록 혐오하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와 같은 강력한 군주가 등장하기를 희망한다. 민주주의를 바라면서도 누군가가 자신들을 강력하게 통치해주기를 원한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중사고의 회로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판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국회선진화법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고 지지했던 당의 주장은 단숨에 바뀌어 지금은 정반대 논리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전에 믿고 있던 논리 체계가 어떠한 권위 있는 사람의 한 마디로 인해 바로 정반대의 사고를 하는 것이다. 아마도 또다시 권위 있는 사람이 반대의 주장을 펼치게 되면 많은 국회의원은 이전의 사고를 지우고 다시 정반대의 사고로 돌아갈 것임이 틀림없다. 그들도 역시 이중사고에 길들여진 것이다.


  왜 그들은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런 함성을 지를 수 없단 말인가? 그는 썼다. 그들이 의식을 가질 때까지는 결코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는 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소설 1984 中>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분별력 있는 사고 능력을 갖춰야 존립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의 철학이 없고 분별력이 없고 이중사고에 익숙해진 시민으로 이루어진 나라에서의 민주주의는 실패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어떠한가. 시민 각자가 삶의 철학과 분명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가.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취업이 힘들고 먹고 살기가 힘든 시대이기에 자신의 철학을 가질 여유가 없다. 제 한 몸 가누는 것조차 힘든 사회에서 생각하고 책을 읽고 사색하는 것은 사치로 여겨진다. 빅브라더가 국민의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고 이중사고를 주입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도 그 누군가에 의해서 점차 물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를 배부른 돼지로 만들고 싶어 하는 그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분별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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