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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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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충선
댓글 0건 조회 5,885회 작성일 17-05-03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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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xxx 번역

 

‘자유론’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존 스튜어트 밀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최대 다수의 양적 효용성을 중시했던 19세기 공리주의의 창시자 제레미 벤담의 제자로써, 벤담과는 다르게 공리주의에 ‘질’이라는 관점을 부가시킴으로써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나간다. 개개인의 의견과 자유를 중시하는 그의 철학 덕분에, 민주주의의 뿌리를 세운 인물이라고도 평가 받는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으로써 그는 고전적인 자유주의자와 다르게 ‘자유 사회주의자’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가 인간의 개별성에 못지않게 사회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별성’과 ‘사회성’ 이라는 두 가지의 성질의 조화에 대한 그의 생각이 간결하게 나타나 있는 책이 바로 ‘자유론’ 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론’의 앞부분은 ‘개별성’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개개인에게 자유는 기능론적인 차원과 근본적인 차원에서 모두 중요하다. 먼저 기능론적인 차원에서, 자유는 효용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꼭 필요하다. 어느 누구도 당사자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염려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보다 자기를 더 잘 아는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문명화된 사회의 충분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 누구보다 더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의 행동이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면, 각자에게 맡겨두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 최선의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또한, 밀은 효용성의 측면을 넘어서서 그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 미칠 수 있는 결과와 상관없이 각 개인이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높은 사람이나 혹은 자신보다 똑똑해 보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바람직해 보인다고 해서 무비판적으로 그 모습을 모방해서 살아서는 안 되며, 자신의 삶을 자기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밀은 언론을 통해서나 혹은 크고 작은 논의가 열리는 자리에서 ‘소수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억압하는 행위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한다. 대량 생산, 대중 교통, 대중 교육, 그리고 언론의 발전 등을 통해 사회 전체의 의견이 하나로 만들어지는 것이 예전보다 훨씬 수월해 졌고, 그에 따라 소수의 의견에 대한 묵살이 심해진 현대 사회에서 그는 소수 의견에 대한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마치 모든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설령 그것이 잘못된 의견이라고 할 지라도,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시킴으로써 진리를 더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인간이 속한 사회 전체가 공통된 생각을 가지는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말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 요소인 ‘개별성’이 설 자리를 잃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다.

 

이렇게 ‘개별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밀이지만, 밀의 철학은 결국 질적 공리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효용 증대에 반대되는 무분별한 자유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인 인간이 되겠다’ 라고 말한 밀의 질적 공리주의는 결국 ‘자기 발전’ 이라는 방향에 중점적인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 방향에 어긋나는 무분별한 자유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또한 그는 인간의 행위 중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행위’와 ‘자기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행위’를 구분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행위 (즉, 사회 전체에도) 에 대해서의 무분별한 자유의 허용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행위’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절대적인 주권을 누려야 하지만, 남에게 해를 끼칠 경우에는 절대적 자유는 허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처음 ‘자유론’이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행동을 할 때라도 자유를 중시해야 된다라는 의견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줄 알았던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충격적이겠지만, 밀은 ‘자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아래와 같이 개진한다.

‘이 원리가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략) 아직 다른 사람의 보호를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외부의 위험 못지않게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로부터도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즉, 비문명화된 지역의 사람들이나 미성년자 같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철학적인 지식이 풍부하지 않지만,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여러 번 반복해서 책을 읽었던 내 생각에는- 옳은 방향이 무엇이고 스스로가 그리고 사회 전체가 발전될 수 있는 방향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이, 비록 소수의 의견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뜻대로 간섭 받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 이것이 밀이 주장하는 자유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몇 달 전인가, 영리하고 다방면으로 생각이 깊어 자주 조언을 구하던 친한 동생과 오랜만에 만났던 적이 있었다. 대화가 깊어지면서 여러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자연스럽게 미성년자의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성관계에 대한 주제에 대해 조금은 격렬하게 의견이 부딪혔다. 이러한 영역에 대해서는 조금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와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 친구의 의견은 사뭇 달랐다. 아무리 미성년자라고 할지라도 (그 때 이야기했던 나이의 마지노선은 어렴풋이 기억나길 14살 정도였었던 것 같다) 서로간의 충분한 이해가 있고, 또한 사회적인 차원에서 이른 성관계의 위험성에 대해서 충분히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그들도 미성년자 이전에 인간이기에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친구의 의견이었다. 반대로, 나의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충분한 교육이 이루어지더라도 너무 어린 나이에는 혹시나 잘못된 경우에 대해서의 실제로 겪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 교육만으로는 충분히 자각하기가 힘들고, 한 순간의 충동으로 벌어지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미성년자의 성관계가 부적절한 것이다라고 하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 자체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너무도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그 자녀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져왔는지 직접 옆에서 봐왔던 나에게는 그러한 결과들이 너무도 잔혹해 보였다. –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미 이루어진 미성년자의 성관계에 대한 시선이나 처벌 등은 또 다른 논의사항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이미 저질러졌다면 처벌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충분한 격려와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때의 설전이 너무 격렬에 뇌리에 남아있었는지, ‘자유론’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는 그 때의 일이 떠올리며 기라성 같은 철학의 대가 중 한 사람도 역시 이렇게 생각하는 구나! 하고 단편적인 생각으로 작은 위안을 얻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철학의 역사는 인간 본질에 대한 대가들의 생각의 전개와 그에 반박하는 또 다른 대가들의 사상의 서로 엮이며 발전해 왔고, 시대에 따라 이전 시대에는 진리로 여겨졌던 생각들이 수 세기가 지난 후에는 전혀 맞지 않는 사상이 되어 가기도 했다. 앞서 다투었던 미성년자 성관계의 문제도, 시대가 지나게 되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치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주장하는 것 마냥 이상한 의견으로 비춰질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 옳다고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자유로운 의견 전개와 역동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사상의 진보가 결국 밀이 이야기하는 질적 공리주의를 향한 자유로 나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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