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정글북 - 러디어드 키플링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5,210회 작성일 17-03-14 01:07

본문

정글북 – 러디어드 키플링

 

이규섭

 

  현실에서 어떤 일의 사유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구차한 사실마저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단순한 이야기이기에 더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설명의 부재는 늘 상상력을 자극하며, 그 안에서 우리는 한층 더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다.

  동화는 현실의 복잡한 문제를 아이의 시선에 맞추어 많은 부분을 가지쳐내고 핵심만을 추려내어 정제한 작품이다. 하나의 강렬한 주제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그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더 냉철하게 현실을 폐부를 찌르는 듯하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은 부분이 넘쳐나기도 한다.

  개봉 당시 흥행여부와 무관하게 독특한 반응을 이끌었던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는 하나의 예시가 될 것 같다. 겉보기 주제는 육식동물의 전유물인 경찰이라는 직업을 당당하게 실력으로 차지하는 토끼 아가씨의 이야기이지만, 설명하지 않는 부분 너머에는 ‘언제든 초식동물을 잡아 먹을 수 있는 육식동물의 존재와, 범동물의 평등사회라는 설정이 가져오는 모순’, 그 모순이 가져오는 ‘육식동물에 대한 역차별’, 그리고 대부분의 동화들이 가지는 ‘권선징악을 위한 불합리한 전개’(선한 자의 무의식적인 악행에는 왜 항상 납득할만한 이유가 따르는가)등의 파고들 만한 수많은 세부주제들이 널려 있다. 이런식의 사고가 지나치게 확장되면 중심주제를 따라가기 어려워 지기 때문에 우리는 동화를 본다는 그 시점에서 어느 정도 암묵적인 동의를 한 채로 작품을 보게된다. 그러나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작품들이 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정글북은 내가 어린시절 가장 좋아하던 만화영화중 하나였다. 주인공 모글리와 함께 늙은 회색곰 발루가 부르는 bear necessity는 욕심을 버리고 이 세상을 즐기면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 주변에 이미 있다는 흥겹고도 익살스러운 노래다. 구수한 목소리의 아저씨가 부르는 더빙 버전의 번안곡을 흥얼거리며 따라부르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전 이 애니메이션의 실사판 영화가 개봉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이 만화가 원작이 있다는 사실과 그 저자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백인우월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작품을 다수 남겼으며, 그 사실이 그가 대중의 호응을 얻는데 많이 기여했다는 점 때문에 그 의미는 퇴색되었지만, 원작 소설을 읽어볼 흥미를 불어오기에는 충분했다.

  모글리라는 소년이 사고로 인해 정글에서 늑대의 아이로 자라게 되고, 그 과정에서 호랑이 시어칸을 피해 도망치는 과정에서 다시 정글로 돌아갈지, 인간의 마을로 돌아갈지 고민하다가 불의 힘과, 동물 친구들의 힘을 빌려 호랑이를 무찌르게 되는 것이 줄거리인 이 작품은 흥미롭게도 작품에 따라 그 결말이 다르다. 내가 처음 접한 애니메이션에서는 모글리는 영악한 소녀의 윙크 한방에 넘어가 마지막 순간 인간의 마을로 돌아가게 된다. 엔딩씬에서 ‘이게 뭐람!’하는 곰의 표정과 곰을 달래주는 흑표범 바기라의 표정이 재미있다. 반면 최근 접한 영화에서는 정글에서 살아가는 결말을 맞이한다. 소설을 읽어보니 애니메이션은 소설의 초반부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며 모글리는 정글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정글을 오가기를 반복한다.

  결국 같은 줄거리임에도 핵심 줄거리가 무엇이냐에 따라 결말과 중심주제가 미묘하게 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 모글리는 인간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동물임에도 자신을 동물과 차별지음으로써 특별한 존재로 생각한다. 허나 모글리는 사고로 인해 동물들과 함께 자라면서 그러한 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 였다. 주변에서 수시로 ‘너는 우리와 달라’라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내지만, 결국 잘 적응해 낸다. 하지만 인간에게 당해서 한쪽눈을 잃은 호랑이 시어칸이 모글 리가 사는 지역으로 갑자기 이주하면서 모글리의 늑대 부모는 모글리를 인간 마을로 대피시킨다. 인간의 ‘불’에 당한 호랑이가 인간의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인간 마을로 도망치는 과정동안에도 모글리는 계속해서 호랑이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결국 최후의 순간에 모글 리가 직접 인간마을에서 ‘불’을 훔쳐와 시어칸을 해치우고 평화가 찾아온다.

  인간과 동물은 다르다. 그 하나의 관점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결론을 다르게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인간과 동물을 명백히 다르며, 동물끼리 어울리는 것과, 동물과 인간이 어울리는 것은 그 양상이 다르다는 구세대 적인 관점에서는 ‘인간은 인간답게 인간의 마을로’가는 애니메이션이나 소설의 결말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반면 최근 개봉된 실사 영화에서 모글리는 자신이 인간의 마을에 어울리는지, 정글에 어울리는 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디에 있고 싶은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고민한다. 그래서 ‘불’을 사용하는 결단을 통해 스스로가 다른 동물과 구분이 되는 인간임을 보이면서도 계속해서 다른 동물들과 어울려 정글에서 살아가는 선택을 하게되는 것이다. 시대나 세상의 절대 다수가 주장하는 근거 없는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것보다 스스로의 신념을 확립하고 그것을 사회에 얼마나 올바르게 주장할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현실을 반영한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작품이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그 내용이 함축적이고 명료함으로 인해 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가진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누군가는 과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만큼은 지나친 생각이 어디 있겠는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