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청년은 왜 군대가서 돌아오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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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청년은 왜 군대가서 돌아오지 못했나
김종대, 임태훈
폭력과 인권
뉴스는 본래 그 말의 뜻처럼 새로운 것을 지칭한다. 하지만 좀 더 살펴보면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닌 약간의 변용을 거쳐 다시 들려오는 과거의 것이다. 항상 매해 반복되는 뉴스들을 상기해보면 알 수 있다. 정치권의 이야기들이나 사회의 사안을 놓고 벌어지는 기득권과 시민단체들의 충돌, 연예인들의 가십 기사 등이 반복된다. 마침 3.1절이 되니 역사를 기억하자는 외침 아래 그와 관련한 수많은 기사들도 쏟아진다. 미리 보건대 식목일이 가까워지면 나무를 심자면서 각종 유명 인사들이 삽을 들고 흙을 뿌리는 장면들이 실린 기사들이 나올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뉴스다.
이 시기만 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또 하나의 기사가 있으니. 바로 대학에서의 신입생 군기잡기다. 언론을 통해 실상을 전달하여 상황 자체를 전복시킨 예를 정치권이나 사회에서 수차례 목도했지만, 대학 내의 이러한 문화는 유독 똑같은 양상으로 매년 반복된다. 씁쓸하게도 우리는 보통 그 힌트를 군대문화라는 단어에서 찾게 된다. 사실 이러한 뉴스에서 가해자로 등장하는 인물들, 혹은 실제 지금 내 주변에서 신입생을 대한답시고 선배쯤의 사람들이 후배 대하는 것을 지켜보면 오히려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유독 군기를 잡는다고 설쳐댄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기사에서 언급되는 군대문화는 사실 남성들이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군대에서의 문화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내 경험상 그 역시 틀린 말은 아니기에 함께 엮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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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지금의 군대를 보고 요즘 참 좋아졌다고 말한다. 다녀온 사람들은 다들 이해할 수 있겠다. 돈도 인상되고, 악습도 개선되고, 환경도 좋아지고, 아무튼 처우가 좋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그렇다면 가령 형도와 용준이가 무언가의 계약을 맺었다고 가정해보자. 애초부터 용준이에게 너무나도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계약 조건이 성사됐고, 더하여 최저 임금 수준에 턱없이 부족한 임금 계약을 했다고 치자. 거기서 내가 약간 대우를 좋게 해줬다고 해서, 용준이는 과연 박수치고 기뻐할 수 있을까? 같은 맥락에서 군인들은 '요즘 군대 좋아졌다'고 행복감에 젖어 군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군대를 경험하지 사람들 역시 취업훈련 프로그램, 희망적립금, 사이버강의 등의 다양한 정책을 보면서 군대가 좋아졌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실상 이러한 것들은 국방부의 포장일 뿐이다. 군대에서 학점인정, 자격인정, 학력인정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누가 보면 군대가 무슨 교육기관인 줄 알겠다. 군대 안에서 병사들이 하는 일들은 크게 세 가지다. 훈련, 일과, 그리고 사역이다. 그렇다. 군대는 앉아서 무언가를 하는 곳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군대는 본질적으로 폭력(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이거나)을 배우고 관리 받는 비교육 집단이다. 병사로 치면 2년 동안 자유를 박탈당하고 통제된 생활을 하는 곳이다. 하루 종일 일하고, 훈련하고, 노동하고, 저녁 때 무슨 학점을 따겠나. 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다.
위와 같은 대학문화를 형성하는 데 일조한 군대문화는 본질이라 치부되는 폭력에서부터 시작한다. 과거의 군대는 철저한 상하관계를 바탕으로 개인이 집단을 처벌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집단을 폭력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아무리 직책과 계급의 군대라 하더라도 위험부담이 따른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집단이 개인을 처벌하는, 더욱 무섭고 효율적인 구조로 변화했다. 군대는 그렇게 하나의 약자를 희생시켜 전체 질서를 합리적으로 유지하는 집단으로 변화했다. 여기서 희생자는 실제 사회에서의 약자를 칭하는 것이 아니다. 가까운 예로, 입대 전 대학교 과대표를 맡으며 대인관계가 원만했던 윤 일병은 부대의 이러한 구조질서에 의해서 약자가 되었다. 자신이 결함이 없더라도 누군가들에 의해 누구라도 약자가 되어 희생될 수 있는 곳이 군대다.
누가 누구를 처벌하던 간에 여기에는 폭력을 통해 질서를 유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군대는 원래 폭력이 용인되는 곳이라는 사회적 학습을 받고 들어온 청년들은 구타 가해자를 신고하는 것이 배신으로 간주되는 것을 보면서 폭력을 인정한다. 그 순간 폭력은 소통의 수단이 되고, 그 소통을 바탕으로 악행을 하는 것이 자신의 생존방식이 된다. 그러면서 폭력은 그들이 본질적으로 그곳에 존재하는 이유, 그리고 남자라는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합리화된다. 윤 일병의 사례는 단지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이 되는, 그리고 정신을 차리기 위한 집단적 과정 속에서 일어났던 사고에 지나지 않게 된다.
비슷한 사건의 가해자(선배들도 포함)들은 보통 자기변명에 불과한 도덕적 불가피성의 논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사건이 처음 알려질 즈음엔 당당하다. 사회 구조 속에서 그들은 그들이 옳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피해자는 상대적으로 경쟁에서 밀렸거나 혹은 약자였다면 탄압받아 마땅한 존재일 뿐이다. 아직까지 인권이 크게 존중받지 못하는 우리사회에서 이는 어쩌면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일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는 히틀러가 있다.
이러한 특성이 있더라도 사실 대학 군기문화의 모든 근원이 군대라고 보기는 힘들다. 군대는 사회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 둘은 매우 닮았다. 한 사람이 적응을 못하면 불량품이라 규정하고, 배제하고, 집단에서 분리시키는 구조 논리는 사회에서나 군대에서 모두 적용될 수 있다.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로부터 내려온, 인간을 마치 통제와 복종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인간관은 학교는 물론이고 직장에서도 재현된다. 단순히 학교 내에서 어린 학생들이 인권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과 선배랍시고 단체기합 등으로 군기를 잡는 행동은 본질적으로 군대의 환경과 동일하다. 즉,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곳이라면 군대건 사회건 폭력이 발현될 수 있을 여지가 있다. 인권이 무시되는 환경, 소수자 혹은 약자에게 가혹한 사회는 폭력을 용인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긍정하기까지 한다. 이런 사상은 ‘군대는 폭력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곳이며 그것이 군대의 본질’이라는 왜곡된 군대관의 기반이 된다. 이렇게 군대에서의 폭력을 긍정하고, 필요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군대의 특수성을 지적한다. 군대는 적과 싸우기 위한 집단이기에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군기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독 다른 나라들에 비해 우리나라 군대와 사회는 사적인 영역에서까지 명령과 복종 관계를 강요받는다. 인권이 배제된 것이다.
상식론이라는 책에는 인권은 인간에게 있어 당연한 상식이라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 인권은 아직 상식이 아닌 듯하다. 군대에 인권을 도입하는 것은 너무 이른 일일지도 모르고, 고로 사회에서 이러한 폭력성이 되풀이되는 것도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른다. 본인이 선배임을 어떻게든 인식시키려는 행동들, 혹은 마치 후배들은 당연히 저렇게 다루어져야한다는 사상들을 가진 사회의 모든 자들은 사실 본인이 그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들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그들 역시 자신들의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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