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하얼빈 - 이효석 -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성호
댓글 0건 조회 5,854회 작성일 17-04-08 01:36

본문

"키타이스카야는 이제는 벌써 식민지에요. 모든 것이 꿈결같이 지내가 버렸어요" - 하얼빈 중 -

  나는 요즘들어 일제 감정기 시대의 우리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상실감 가운데서 식민의 아픔을, 민족의 긍지를, 그리고 해방의 열망을 나타내는 당시의 문학을 읽노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고 애국심에 고취가 되는 것을 느낀다. 총이 아닌 펜을 통해서 일제와 강력하게 저항했던 많은 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서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나의 눈에 띄었던 작품은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이효석이라는, 한 때 친일파라는 이야기로 논란이 많았던 작가의 소설 "하얼빈"이었다. 병든 아내와 딸을 위해 잠시 친일을 하다 다시 뉘우쳤던 사람이라는, 논란도 이야기도 많은 사람이 쓴 소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하얼빈"은 매우 오묘한 소설이다. 소설은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식민지가 되어버린 하얼빈을 그리지만 '일제'나 '일본'이라는 단어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작중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배경과 출신, 국적조차 직접적인 언급이 없고, 모두 이야기의 흐름과 정황을 통해 파악해야 한다. 생계를 위해 일본에도 팔 수 있는 글을 써야했던 이효석이었기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소설 "하얼빈"은 직접적으로 일제를 비판하거나 민족심을 자긍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조국이 식민지가 된 후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잃고 살아가는 우리 백성들의 아픔을 하얼빈이라는 땅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러나 너무도 생생하게 그리는 작품이다.

  소설 "하얼빈"이 초반부에 그리는 하얼빈의 키타이스카야 거리는 밝고 아름답다. 키타이스카야의 중심지에 자리잡은 호텔 삼층에서 주인공은 키타이스카야 거리를 바라보면서, 키타이스카야의 그림과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주인공은 거리의 사람들을 통해 느껴지는 생기와 어우러짐으로 만드러지는 아름다움을 마치 연속되는 요란한 음악과 같이 여기며 키타야스카야 거리를 사랑한다. 여행자의 신분으로 키타야스카야 거리를 사랑하고, 해마다 만나는 카바레 '판타지아'의 아가씨 유우사를 사랑하고, 키타이스카야 거리 사람들의 여유와 운치있는 건물들을 사랑한다.

"지금 눈 아래의 거리는 사실 벌써 작년 여행에 본 그 거리는 아니다. 각각으로 변하는 인상이 속일 수 없는 자취를 거리에 적어간다. 오고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변했거니와 모든 풍물이 적지 아니 달라졌다... (중략) 나는 이 변화를 보러 해마다 오는 것일까" - 하얼빈 중 -

  그러나 주인공은 그가 사랑하던 거리가 변해감을 느낀다. 세계 2차대전의 패배로 인해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사관이 버려져 셋집이 되어버리고, 사람들은 서로의 출신과 신분으로 차별하고 질투하며, 나라를 잃은 사람들은 그 슬픔으로 삶의 방향을 잃고 고향으로 떠나려는 모습을 보인다.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부정이라도 하는듯 특별한 꿈이나 삶의 목적 없이 하루 하루의 즐거움과 향락을 위해 살아가고, 키타이스카야의 새로운 풍물은 그렇게 낡고 그윽한 것들을 밀어내버린다. 이러한 키타이스카야를 바라보면서 주인공 또한 그 삶의 목적이 없음을 느끼고 사색하고 방황한다.

"강을 바라보면 저는요... 언제나 죽구 싶은 생각뿐예요." - 하얼빈 중 -

  키타이스카야 거리의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주인공이 카바레 '판타지아'에서 만나는 유우라라는 여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국을 그리워하며 소련으로 돌아가기 위해 변소지기로 푼돈을 모으고 있지만, 유우라는 삶의 목적을 잃은체 죽지 못해 사는 것 마냥 하루 하루의 향락만을 위해서만 살아간다.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것을 무시하고 담배를 피우고, 돈을 벌기위해 지저분한 일을 하며, 기분이 우울하면 죽음을 생각하는 유우라의 모습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키타이스카야의 모든 우울을 짊어지고 있는듯 하다.

  나는 하얼빈을 읽으면서, 마치 이 이야기에 나오는 키타이스카야의 모습과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17년 대한민국의 모습이 투영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삶의 고난 앞에 무기력함을 느끼며 힘든 일 앞에서는 쉽게 포기하고, 자신이 살고있는 그 하루가 즐겁지 않으면 삶의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현대의 젊은이들의 정신이 소설 속 유우라의 사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삶이라는 불길 속에 던져진 성냥개비처럼, 당장의 열기에 취해 순간만을 즐기며 살다 사라져 버리는 불꽃과 같은 인생이라면 그가 바라보는 미래는 잿빛일 수 밖에 없다.

  헤겔은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단어를 통해 한 사회에는 그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이나 관념이 있음을 말하였다. 헤겔의 생각을 비추어 이 시대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해체주의와 허무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절대적인 가치가 무너지고 인류가 세워온 질서와 제체를 의심하며, 자신들을 지켜오던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시대가 우리가 사는 현대 시대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국적도, 종교적 신념도, 성정체성도, 심지어 가정 조차 기존의 가치를 잃고 해체되어감을 볼 수 있다. 뚜렷한 가치가 없는 삶에는 결국 하루 하루의 행복 밖에 남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내일의 소망을 위해 오늘의 고난을 견디는 일을 그만두고, 조금이라도 어렵고 행복하지 않으면 포기해버리는 포기의 시대를 살게 되어버렸다.

  "하얼빈"의 주인공과 유우라가 삶의 의욕을 잃었던 이유는 그들의 부족한 정신력이나 삶의 고난 때문이 아닌 식민지민이 겪는 조국이라는 정체성의 상실 때문이었다. 자기 스스로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앞으로 나가갈 길을 볼 수 없고, 내일의 길을 보지 못하면 영원한 가치를 볼 수가 없다. 결국 이 시대가 마주한 포기의 저주 가운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먼저 확립해야 한다. 허무주의의 시대에 살지만 허무주의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든 가치가 무너질 때 포기하면 안되는 가치를 찾아 붙잡아야 한다. "나는 누구이며 왜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가?", "오늘의 하루를 내어 얻을 수 있는 내일의 소망은 무엇인가?"와 같은 스스로에게 고민과 사색을 주는 질문들을 우리는 끝임없이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나의 삶의 마지막 목적이 육신의 죽음이 아닌, 영원한 가치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