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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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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태인
댓글 0건 조회 6,349회 작성일 17-01-26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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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런드 러셀 저

     

   모두가 잠든 새벽 4시. 어머니는 항상 그 시간에 일어나셨다.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어머니는 매일 그 시간에 일어나셨고, 얼마간의 준비를 마치신 뒤 집을 나서셨다. 이러한 어머니의 행동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했었던 것이었으리라. 어머니가 항상 이른 새벽에 일어나셨던 이유는 새벽 기도에 참석하시기 위함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랐기에 나 역시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고등학생 시절까지의 내 삶은 교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고 일요일에 교회를 가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지금 내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농담하지 말라고 하지만 대학교 신입생까지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남자가 많고 군기가 센 전자과의 특성상 과 선배들의 눈초리를 매번 받았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은 크리스천인 나에게는 원래 그랬듯이 당연한 사실이었다.

 

   우습게도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자세히 언급하고 싶진 않지만, 십대의 언저리에 생각하기도 싫은 개인적으로 끔찍한 일들이 있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다시 그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도 버티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여린 감성을 가진 십대의 사춘기 때에는 그 상처가 얼마나 심했겠는가. 십대의 나는 나에게 닥쳐온 일들이 너무 힘들고 버티기가 어려웠고,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내가 믿는 신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심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하나님께 의지했었고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힘든 일이 닥치거나 고통스러운 일들이 생길 때마다 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동시에 스스로 견디고 버티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다. 그럴수록 나는 왜 누구에게만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가란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고, 스무 살 언저리 무렵부터는 누구에게 의지하는 삶이 아닌 나 스스로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다.

 

   가끔 스무 살까지 잘 다녔던 교회를 왜 더 이상 다니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그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왠지 낯부끄럽기도 하고 혹여나 대답하는 상대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돌아올 답변이 번거로워 대충 얼버무렸던 경우가 많다.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저서는 내가 생각하고는 있지만 용기 있게 말하지 못한 말들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역설한다.


   종교의 기반은 두려움이다. 종교의 일차적이고도 주요한 기반은 두려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이 온갖 곤경이나 반목에 처했을 때 여러분 편이 되어줄 큰 형님이 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그 모든 것의 기초다. p.40

 

   교회에서는 우리를 일컬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후손이기에 날 때부터 죄인이었고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고 예수의 부활을 믿어야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교회에서 말하는 지옥은 어린 시절 나의 두려움을 형성시키기에 충분했고 이 두려움은 매주 나를 교회로 이끌었다. 러셀은 이러한 두려움이 종교의 기반이라고 말한다. 또한, 두려움은 잔인함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강자의 편에 서면 두려움은 도리어 안정감으로 변하게 되고 이는 두려운 존재를 피하거나 없애려고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그 두려운 존재에 복종하며 그 아래에 머무르려고 하는 본성이 있다. 따라서 신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신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구약 성서에서의 하나님은 잔혹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잔혹함을 가진 존재는 역설적이게도 안전을 보장해주는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 세계를 사는 우리는 과학의 도움으로 이제야 사물을 좀 이해했고 어느 정도 정복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과학이 기독교와 교회에 맞서 또한 모든 낡은 교훈에 맞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어렵사리 전진해 온 덕분이다. 과학은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우리의 마음도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고 본다. 이제는 더 이상 가상의 후원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말고, 하늘에 있는 후원자를 만들어내지 말고, 여기 땅에서 우리 자신의 힘에 의지해 이 세상을 지난날 오랜 세월 교회가 만들어 놓은 그런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기 적합한 곳으로 만들자고 말이다. p.40

 

   그렇지만 러셀은 이런 가상의 존재에 두려움을 가지지 말자고 힘주어 말한다. ‘우리 자신의 힘에 의지해 교회가 만든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기 적합한 곳으로 만들자’라는 러셀의 말은 진정 살아있는 영혼을 가진 존재라면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삶이 아닌 자기 스스로 버티는 삶이 진정한 삶이 아니냐고 오랜 시간 고민했었던 내 생각에 확신을 주었다. 그렇기에 나는 종교에 의지하는 삶보다는 러셀이 말한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 더 훌륭한 삶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삶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고 싶지도 않고, 영광을 돌리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발로 서서 공명정대하게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세상의 선한 구석, 악한 구석, 아름다운 것들과 추한 것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되 두려워하지는 말자....(중략) 교회 사람들이 스스로를 비하하며 끔찍한 죄인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이 저럴 수 있을까 하는 경멸감마저 든다. 우리는 굳건히 서서 이 세계를 진솔하게 직시해야 한다. 있는 힘을 다해 세상을 최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바라던 만큼 되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세상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p.41

 

   내가 기독교에 대해서 고민하고, 내 지식과 표현으로는 말하기 힘들었던 주제들을 러셀은 나의 마음을 꿰뚫어보듯이 철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러셀이 모든 종교인들을 무조건 비판한 것은 아니다. 이성적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자고 말한다. 나 또한 모든 종교인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많은 기독교인을 접했고 그들이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종교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나 또한 어린 시절 힘든 일들을 신에게 의지하며 다독임을 받았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수용을 지양하는 자세이다. 자기들의 집단과 다르다고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고 비난하는 요즘의 (일부)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자세는 간음한 여자를 용서한 예수와 사마리아인을 비유한 예수의 자세와는 사뭇 다르지 않은가.

 

   이따금 집에 가면 어머니는 나에게 왜 교회를 가지 않느냐고 묻는다. 대학생이 되고 사회에 나가더니 벌써 세상에 물들었냐고 질책하는 어머니 앞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해도 결코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지 않기에 그냥 멋쩍게 웃고 넘겨버린다. 고백건대 살아가면서 힘들 때 절망이 뼛속까지 침범할 때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내가 믿었던 신이 떠오르면서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싶다. 나도 아직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 두 발로 버티고 세상을 이겨내고자 한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죽지는 않을 테니. 그리고 먼 훗날 내가 스스로 땅에 버티고 설 수 있을 때를 기다리려 한다. 그래야만 내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가 내가 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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