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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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노무현, 노무현재단 저 / 유시민 편집
연구실 선배의 결혼식이 있어 우연히 시청 근처의 한 호텔에 갈 기회가 생겼다. 주말의 서울이 늘 그렇듯 차가 밀려서 허겁지겁 식장에 도착했었기에 결혼식장에 갈 때는 주위를 둘러볼 새가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 선배에게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결혼식장에서 나왔다. 천천히 시청역을 따라서 걸어가는 길에 놀라우면서도 낯 뜨거운 모습이 내 앞에 있었다. 호텔 옆 시청 광장에서는 집회가 한창이었다. 광화문 앞에 촛불을 들고 모였던 무리와는 성격이 사뭇 다른 집회였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큰소리로 무언가를 외치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시청역에서 삼삼오오 모여 나오시는 어르신들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우리나라의 국기가 어쩌다 이렇게 편향된 느낌을 주는지 안타까우면서도 불편했다. 당신들은 분명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게 만들어준 원동력인 동시에 산 증인일진대 왜 그곳에 목청을 높이며 서 있는가 물어보고 싶었다.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오는 내내 무엇이 잘못되었길래 이렇게 나라가 분열되었는지 가슴이 아팠다.
한편으로는 태극기를 자랑스럽게 들고 집회에 참여하시는 어르신들을 비판하기보다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산산이 흩어졌는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옳고 그름의 문제와 상식과 비상식의 문제가 좌와 우의 신념의 문제로 치환되는 우리나라의 고질병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비판하고 비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인식의 프레임화는 단언컨대 국정농단만큼이나 심각한 문제이다. 이 고질병이 해결되지 않으면 앞으로 또 무슨 사건이 터졌을 때 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무언가의 집단으로 편을 가르고 싸우느라 우리가 정작 분노해야 할 곳에 에너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최근 강남역 사건을 필두로 한 남-녀의 대립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얼마 전 유튜브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내가 겨우 초등학교에 다닐 때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기 때문에 TV에서 연설하는 그의 모습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심지어 보수적인 성향의 집안과 지역에서 자란 나였기에 그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를 들은 기억은 거의 없다. 하지만 얼마 전 내가 직접 본 그는 한마디로 혁명가였다. 무려 10년 넘게 지난 지금이지만 그의 연설 한 마디 한 마디는 어찌나 지금의 상황에 맞아떨어지는지. 놀라웠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주권자로서 책임을 다합시다. 옛날에는 왕이 똑똑해야 나라가 편했습니다. 지금은 주권자가 똑똑해야 나라가 편하지 않겠습니까? 추종하는 시민에서 참여하는 시민으로 스스로의 위상을 바꿉시다. - 2007년 6월 2일 노 대통령 참정포럼 월례강연
고백하건대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잘 알지 못했다. 가끔 인터넷 커뮤니티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글이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댓글은 흡사 전쟁터가 된다. 경제성장률이나 한미 FTA, 부동산 정책과 같은 지표를 가지고 와서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고 권위주의를 타파하려는 그의 인간됨을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연설을 보고 나서, 사람들이 왜 노무현 대통령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또 그렇게 싫어하는지 알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은 <운명이다>는 그가 남긴 저서와 미발표 원고, 메모, 편지 등과 각종 인터뷰를 바탕으로 유시민 작가가 편집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책을 조금씩 따라가다 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준다. 잠시나마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삶에 들어가 살아보고 느껴볼 수 있었다. ‘인간적인 모습을 가졌던 대통령.’ 이보다도 그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찾기 힘들다. 그가 이토록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 역시 그의 인간적인 모습 때문일 것이리라. 그가 가졌던 꿈과 희망뿐만 아니라 실패와 좌절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20년 정치인생을 돌아보았다. 마치 물을 가르고 달려온 것 같았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통령은 진보를 이루는 데 적절한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것일까? - 본문 중
노 대통령이 당신의 삶을 돌이켜보았던 위 문구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 빗대어보아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토록 고민하고 바꾸려고 노력했음에도 아직 세상이 바뀌지 않은 것은 사회와 정치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나라의 시민 의식이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냐고 자문해본다.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라는 문구가 마음속에서 쓰라린다.
단언컨대 내 역량으로는 감히 그를 평가할 수 없다. 실로 그는 부끄러움을 아시는 분이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얘기하시는 그의 말에는 우리나라 시민들에 대한 사랑이 묻어나온다. 이 지경까지 만들어놓고 뻔뻔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누군가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가.
비가 오지 않아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다 내 책임인 것 같았다.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으면 어느 것 하나 대통령 책임 아닌 것이 없었다. 대통령은 그런 자리었다. - 본문 중
모든 것이 내 책임이었다. 대통령을 하려고 한 것이 분수에 넘치는 욕심이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꾼 지도자가 되려고 한 것이 나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주변 사람들이 원망스러웠지만 원망할 수 없었다. … 가난하고 억눌린 노동자들을 돕겠다고 소박하게 시작했던 일이 이렇게 끝나리라는 것을 꿈에라도 생각했다만, 애초에 정치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해 보고 싶었던 꿈을 모두 다 접었다. - 본문 중
오늘도 어디선가 촛불을 든 사람과 태극기를 든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서로가 바라는 것은 더 나은 사회이고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 생각하고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할 수 있는 사회일진데, 무엇이 우리 사이를 편 가르고 싸우게 하였을까. 작금의 시대를 생각하면 질문과 고민 그리고 한숨이 끊이질 않는다. 우리는 왜 거꾸로 걷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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