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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 C. S.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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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충선
댓글 0건 조회 6,578회 작성일 16-11-04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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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C. S. 루이스

기독교인임을 밝히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가까운 친구들이나 같이 생활하는 동료들에게 기독교와 관련된 여러가지 곤란한 언급이나 질문들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도대체 과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 천국과 지옥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믿는 이유가 무엇이냐’ 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은 사람일 뿐인데 왜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믿는 것이냐’, 혹은 ‘기독교에서는 죄를 지으면 회개하면 무조건 용서해 준다고 하는데 그럼 일단 나쁜 짓부터 하고 교회에 나가서 기도 한 번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와 같은 조금은 깊게 생각을 해야 하는 질문들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들에 더해서, ‘교회 목사는 앞에서 설교만 하고 성도들이 알아서 돈을 걷어서 주니 돈을 긁어 모을 수 있겠다’ 라던지 ‘목사와 기독교인들 중에는 왜 이렇게 범죄자 (특히 성범죄자) 가 많은가?’와 같은 약간은 놀림 투의 어투로 언급하는 주변인들도 꽤나 많이 만나본 것 같습니다.


제가 기독교 해설서 중 가장 유명한 고전 중 하나인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고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첫번째로는 관련된 질문들을 하였을 때 제가 믿고 있는 것들을 말로써는 그들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던 저의 부족함을 잘 정리되어 있는 책의 내용을 빌려 글로써 보충하기 위해서이며, 두번째로는 비기독교인에게 보여지는 연일 언론을 통해 쏟아지는 현대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들로 더럽혀지고 있는 기독교에 본질에 대해 설명을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저는 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관련해서 아는 지식도 많지 않아 말 할 수 있는 자격이 없지만,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사항들을 언론이나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 왜곡되게 접해왔던 제 주변에 소중한 동료들에게 조금이나마 바르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먼저, 두 사람이 말싸움을 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당사자들은 상대방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고 기대되는 행동 기준에 대해 호소하게 됩니다. 즉, 두 사람 사이에 ‘옳은 행동’이 무엇인가에 대해 일종의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면 다툼은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름’을 허용하는 정도의 차이는 개인마다 있을 수 있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서 얻어질 수 없는 옳고 그름에 대한 일정한 기준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기묘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제가 아는 한 단 한 명의 사람도 이러한 방식 그대로 살고 있지는 못합니다.


잠시 시선을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로 돌리면, 이 우주가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에서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유물론적 관점으로, ‘물질과 공간은 우연히 생긴 것으로서 그 존재 이유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관점은 종교적인 관점으로, 이 관점에 따르면 우주의 배후에는 지각과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무언가가 실재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과학으로는 도저히 둘 중에 어느 관점이 옳은지 알아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과학은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관찰함으로써 이루어 지기 때문에, 어떤 사물이 왜 존재하느냐, 사물들의 배후에 무언가가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증명해 낼 수 없습니다. 빅뱅이론이나 상대성이론과 같은 현대 과학이 자랑하는 이론으로 우주와 물질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게 되더라도 ‘왜 빅뱅이 일어났는가?’, ‘시간과 공간은 왜 휘어져 있는가?’과 같은 질문은 과학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모든 것들은 우연히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보면, 앞서 설명한 우리를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실재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무의미하다고 하면, 그것들과 그 일부인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는 것 조차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해 배후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집을 지은 건축가가 곧 그 집의 벽이나 계단이 될 수 없듯이, 우주를 통제하는 존재는 해나 달, 나무와 같은 사물 중 하나가 아니라 우리를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내면의 영향력으로만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나’ 라는 인간을 열어 보았을 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어떤 법칙 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 즉 ‘내가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주를 통제하는 실재-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한’ 존재 그리고 ‘의로운’ 존재로서,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공의로운 분으로써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분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이 세상과 구별된 존재이며, 세상의 어떤 것들은 그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믿습니다. 또한 기독교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잘못되어 버렸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다시 바로잡을 것을 명하신다고 믿습니다.


기독교적 관점을 좀 더 들여다보면,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 이라는 개념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제일 흔한 주장은 ‘전쟁과 살인이 끊이지 않고, 사기꾼과 아첨꾼이 성공하는 등의 불의가 끊이지 않는 이 세상을 그렇게 선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만약 계시다면 가만히 놔 두었을 것이냐’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 상태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절대적 권세를 가진 존재의 뜻에 반하는 이러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오늘 밤부터는 너희 공부방을 정리해 주지 않을 거야. 이젠 너희도 스스로 방 정리하는 법을 배워야지” 라고 말하는 것은 부모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공부방에 가 보니 방이 온통 어질러져 있습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방을 잘 정리하길 더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아이들에게 방을 어지럽힐 수 있는 자유를 준 것 역시 어머니의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유 의지-자아-를 가진 존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속성으로 인해 인간에게 만약 자유로운 의지를 주시지 않으셨다고 하면, 인간은 마치 프로그램에 입력 받은 대로 행동할 수 밖에 없는 로봇과 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로봇이 아닌, 하나님 그리고 이웃과의 연합과 사랑을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누리며 행복할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의지의 존재 때문에 악을 행할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인간이 자아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갖게 되는 순간, 자기 자신을 앞세울 가능성–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어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은 죄였고, 사탄이 인류에게 가르친 죄입니다. 창세기 초반에 나오는 사탄이 아담과 이브에게 사과를 건내 주면서 불어넣은 생각 역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곧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없어도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라는 생각과 일치합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여러 문명을 건설하고, 훌륭한 제도들을 고안하였지만 매번 무언가가 잘못되었습니다. 기술과 정책, 제도와 같은 인류의 유산들은 점점 더 발전 되어 왔지만, 그로부터 권력, 야망, 전쟁, 매춘 계급, 노예제도 등 무서운 개념들이 탄생했고, ‘정말 지금이 가장 행복한가’에 대한 의문은 끊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빠져 있는 ‘곤경’은 스스로 독립적인 위치에 서고, 자기의 주인인 듯이 행세하려 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 란 이런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그 동안 잘못된 길을 걷어 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일단 나쁜 짓을 하고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수천 년 간 익혀 온 자기 의지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될수록 회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작아지게 되고, 결론적으로 완전히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전혀 죄가 없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씻기 위해서는 죗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죗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죄인이 아닌 완전히 죄가 없는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죗값을 치러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죄는 하나님이 본성상 절대 하지 않는 일-항복하고 고통을 겪으며 복종하여 죽는 일-에서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가지고 있는 것만 것 나누실 수 있는데, 이것은 본성상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고 가정하면, 그 사람은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므로 자기 뜻을 포기하고 고난을 겪고 죽을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므로 이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죽지 않는 한 우리는 그의 죽음을 나누어 가져 회개라는 죽음을 시도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인간이 되지 않는 한 죽으실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서 내려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우리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해 주어 새로이 출발하게 해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했으며,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주었고, 그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다는 것이 바로 ‘복음’ 이며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안타깝게도, 교회 내부에서도 이러한 ‘복음’을 모른 채로 단지 복을 받고 싶다거나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을 여럿 보게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목사와 장로와 같은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성폭력의 가해자로, 또는 공금 횡령의 중심으로 언론에서 집중 포화를 받는 모습들도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여, 저러한 사람들도 정말 ‘그리스도인’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들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교만’한 모습과 ‘이기적인 모습’ 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기독교를 왜곡되게 느끼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본질’ 이 아닌 피상적이고 더러운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사람들이 왜곡되고 더러운 모습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님을 알게 되고, 기독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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