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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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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태인
댓글 0건 조회 7,343회 작성일 16-11-2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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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 장 폴 사르트르



  한때 제국주의가 활개를 치던 시대가 있었다. 18세기부터 19세기의 유럽과 그 식민지에서는 흑인 노예무역이 성행했다. 산업화로 인한 노동력의 확보가 필요했기에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 주민들을 자국의 본토로 운반하여 노예로 부려먹었다. 조선시대의 양반이 노비에게 그랬던 것처럼, 유럽인들은 흑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흑인은 교육되지 못하고 본인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짐승과 같이 취급을 했다. 노예를 아프리카로부터 운송할 때에도 아래와 같이 흑인 노예 1인당 최대한 면적을 줄여 많이 싣기 위해서 거의 가축이나 짐을 운반하는 것처럼 운반했다.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운반하는 시간이 대략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유럽인들은 한 달 동안 흑인 노예들에게 먹고 살 정도의 최소한의 물만을 먹였고, 대소변도 처리하지 않고 방치했다고 한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운송 과정에서 대략 50%의 노예들이 죽었다고 한다. 100명을 저런 방식으로 운반해서 50명이 살아남는 것이 10명 실어서 10명을 살리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이득이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운반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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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슈비츠에서 대량 학살을 행한 나치도 유대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행한 잔인한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인간 이하로 생각했기에 우리들을 노예로 부려먹고, 행여나 죽이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그들이 믿었던 인간의 이성과 과학은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풍요로움과 자유를 가져다 줄 것 같았던 이성과 과학은 도리어 그들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그들은 근본적인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기존에 고민했던 ‘인간은 무엇인가?’ 혹은 ‘인간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닌 ‘인간이기 위한 조건이 필요한가?’와 같은 것들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에 실존주의가 탄생하였다.

 

   실존주의란 말 그대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다. 인간이 되기 위한 어떤 조건들, 예를 들자면 사회나 문화, 교육 등은 인간의 본질이다. 반대로 실존이란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를 의미한다. 즉, 실존주의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은 인간이기 위해 가져야 할 조건은 없고 인간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볼펜은 무언가를 기록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만약 볼펜이 부러지거나 잉크가 다 되어 기록할 수 가 없다면 볼펜은 의미가 없는 막대기이다. 그렇기에 볼펜은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 본질이 충족되지 못하면(볼펜이 기록하는 기능을 가지지 못한다면) 실존은 의미가 없어진다.

 

   실존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이러한 관점이 인간에게도 적용이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잔인한 흑인 노예의 운반이나 나치가 유대인에게 했던 학살,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행했던 끔찍한 일들은 본질이 실존을 우선한다고 생각했기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물론 자기들만의 기준이었지만 말이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은 문화적으로 매우 뛰어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들보다 그들의 문화를 열등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히틀러 역시 게르만족은 유대인보다 우수하다며 유대인을 핍박했다. 반면 실존주의는 이러한 것들을 거부한다. 인간은 그냥 인간일 뿐이다. 배우지 못하고 문화적으로 뒤쳐진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인간이다. 현대적 인권의 개념은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이기 위한 조건은 없다. 그래서 아무리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범죄자들이 최소한의 인권을 존중받는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본질이 실존보다 더 앞선다. 학생은 학생 자체로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 훌륭한 학생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성적이 좋아야하며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야한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학생은 부모님 혹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부모님이 원하는 것 혹은 타인들이 선망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엘리트 학생들이 자살을 많이 하는 이유이다. 이전에 카이스트 학생의 잇따른 자살로 사회가 떠들썩했던 적이 있었다. 카이스트에서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자살한 학생이 11명에 이른다고 한다. 카이스트 학생뿐만 아니라 최근 뉴스에서도 실제 설문조사에서도 약 10%의 우리나라의 중고등학생들이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고, 약 2%의 학생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해 본 것으로 나타났다1). 기사에 따르면 자살을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부모와의 갈등’ 혹은 ‘성적 문제’라고 한다. 학생은 단연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다. 그래서 공부를 못하면 학생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본질을 부정당하기 때문에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느끼기에 자살을 하는 것이다. 등수가 떨어진 성적표를 가지고 부모님에게 보여드렸을 때 괜찮다고 할 수 있는 부모는 단언컨대 많지 않을 것이다.

 

   비단 학생뿐이겠는가. 남편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본질, 아내는 내조를 잘해야 한다는 본질, 30대가 되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야한다는 본질, 40대는 이러해야하고 50대는 이러해야한다는 본질. 명절 때 본가에 내려가면 흔히 듣는 잔소리들이지 않은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40대는 40대이기 위해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은 없고 50대는 50대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없다. 그냥 그것으로서 인정을 하면 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이 부족하다. 현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작가인 프랑수아즈 사강이 말하지 않았던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주인의 덕목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에 있고 노예의 삶은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데에 있다.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사는 삶은 노예의 삶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각자가 각자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다만 그가 스스로 생각하는 그대로일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원하는 그대로이다. 그리고 사람은 존재 이후에 스스로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이외엔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이 또한 사람들이 주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존재가 본질을 앞선다면 사람은 자기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이래서 실존주의의 첫 걸음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존재의 주인이 되게 하고 그에게 그의 존재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p. 16

 

 

   혹자는 말한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소위 ‘꼰대’가 많고 남들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많아서 주체적으로 살기가 쉽지 않다고, 기준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의 현실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난 주말에 100만 명이 모인 광화문에 발을 내딛었을 때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시민은 각자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각자의 삶의 주인이 되어 각자가 선택을 하고,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타인의 기준에 나를 부합시킬 필요가 없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각자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1) http://www.ytn.co.kr/_ln/0103_201611251505479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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