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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탄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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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유진
댓글 0건 조회 6,019회 작성일 16-12-1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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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이다. 헌정사상 유례없는 국정농단 사태를 바로잡기 위한 전국민의 열화와 같은 목소리로 가득하다. 이러한 시국에 대한 타파 방법으로써 기도를 통해 염원하는 경우를 가끔 보곤 하는데, 흥이 나는 송가와 경건한 느낌의 평화적 시위는 정교분리의 개념을 떠나 정국 파타에 대한 국민들의 염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 중, 일반적인 종교인이라고 보기 어려운 과격하고 저돌적인 태도를 통해 목소리를 내는 자들 또한 심심치 않게 목격되곤 하는데, 그들은 어지러운 정국에 대한 시선이 획일적일 수는 없다 보니 개인적 또는 정치적 신념에 따라 염원의 목소리가 다를 수 있겠으나, 이러한 성향을 차치하더라도 그네들의 행동은 목적보다 수단에 얽매인 것처럼 보이고, 상대적인 약자로 보이는 자들에게 강압적으로 사상을 강요하는 모습은 지나가는 이들의 따가운 눈총을 사게 하곤 한다. 미국의 비평가 앰브로즈 비어스는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도를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게 하는 부당한 행위로서 비난하며 신은 특정인의 기도를 들어주고 기적을 이루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얘기한 바 있으며, 기독교의 대표적인 기도문인 주기도문은 중언부언하거나 사욕을 드러내지 않고 현세에 대한 안녕과 권세에 대한 영광을 담담한 어조로 경배한다. 통수권자에 대한 탄핵 여부를 절대자에게 청원하며 주변인들에게 소리지르는 그들에게 기도란 무엇일까? 

  며칠간의 병마에 시달리다 고달픈 심신을 이끌고 돌아온 대전은 여전히 푸근하였으며, 십수 년간의 생활에 지겨울 법도 하지만 그 그리운 익숙함에 잠시 거리의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내게 아주머니 몇 분이 웃으면서 다가 왔다. 소위 이단으로 불리는 종파의 전도사인 그들은 내게 호의적인 태도로 다가와 전도를 권하였는데,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음에도 세간에 익히 알려진 해당 종파에 대한 구설수들에 대해 언급하며 ‘우린 그런 곳이 아니다’라는 논지로 적극적으로 해명 하였다. 얼마간의 대화 후 물러난 그들이 내 손에 쥐어주고 간 전단지에는 그들이 꾸준히 해명해왔던 해당 종파가 가진 종교적 정통성에 대한 주장과, 아마 말을 걸었던 본론이었으리라 추정되는 새로운 구세주의 강림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강림할 (또는 이미 강림한) 구세주를 바로 알고 그를 통해 천국과 영생을 얻으라는 말이었는데, 이는 성도聖道에 이르기보다 거룩한 곳에 입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올바른 구세주를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역설적인 느낌을 들게 하였다.

  지금은 비록 무교이긴 하지만, 미취학아동 시절부터 종교 활동을 다닌 적이 있다. 처음에는 세속적인 목적에 이끌려 간 곳이었지만 집이라는 좁은 구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의 친구들을 처음 만나게 해 준 활동은 일상에 활기를 불어다 주었고, 특히 예배 후 1시간가량 진행되는 집사님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과의 자유로운 담화는 보다 넓은 시야에 대한 나의 갈망을 고무시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의 교화에도 불구하고 내 개인의 신앙심은 그리 깊어지지 않았고, 그 말씀은 당시 초등교육과정에서 형성된 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약 7여 년간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종교 활동을 마무리 하였다. 교과서에서 알려주는 과학적 지식이나 역사적 사실과 상충되어 보이는 몇 가지 기술들 그리고 법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속에서 성전聖典의 중요함은 당시 내가 받아들이기에 다소 버거운 문제였지만, 이 때의 좋은 경험을 통해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경외와 그와 관련된 신성하고 거룩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나의 흥미를 돋운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신에게 바치는 송가인 <기탄잘리>를 통해, 현세의 구도자로서 바라보는 피안의 세계와 님에 대한 경배를 노래하였다. 총 103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시에서 인상 깊은 점이라면 세상 곳곳에 묻어있는 아름다움에 대해 끊임없이 경배 드리면서 님에게 의존하지 않고, 유한하며 나약한 구도자로서의 의지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신을 손길로 말미암아 나를 정화시키기보다, 당신의 손길이 내 온 몸을 어루만짐을 알고 있기에 언제나 육체를 순결하게 유지하고자 노력한다는 구절은 그간의 인지하고 있던 ‘청원을 통한 구원받음’에 대한 인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신앙심이 얕고 지식 또한 부족하기에 103여 개의 시에 달하는 그의 송가를 올곧게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구도자로서 때로는 천진하고 때로는 스스로에게 엄격하면서 님을 노래하는 사랑 가득한 숨결을 통해 비록 응답하지 않지만, 그런 님과의 교감을 이룬다는 것에 대해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는 제 노래들과 더불어 늘 저의 삶 속에서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이 문에서 저 문으로 저를 이끈 것이 그 노래들이었으며
노래와 더불어 저는 제 자신에 대해 느꼈고, 저의 세계를 찾아 만졌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배운 모든 교훈들을
제게 가르친 것도 바로 저의 노래들이었습니다.
노래는 저에게 남모르는 길들을 보여주었고
제 마음의 지평선 위에 하나 하나의 수많은 별들이
제 시야에 들어오도록 가져다 주었습니다.

저의 노래들은 길고 긴 모든 날 동안 기쁨과 고통의 나라, 신비의 나라를 향해 절 이끌어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의 여정의 끝판에 이르른 이 저녁엔 어떤 대궐의 문으로 저를 데려다 놓으신 것입니까?

- 기탄잘리 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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