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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대학원생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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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승윤
댓글 0건 조회 5,401회 작성일 16-11-2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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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대학원생들의 초상
-착각하지 마, 우린 학생이 아니라 노예야


 대학원 총학생회로부터의 한 간담회 참여 유도 공지 메일이 온 적 있다. 그 간담회에 예약을 하고 참여하면 사은품으로 ‘슬픈 대학원생들의 초상’이라는 책을 준다고 쓰여 있었다. 책 제목이 상당히 구미를 당겼다. 간담회를 참여하진 못했지만, 노트 한 구석에 제목을 적어 놓고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였다. 본 책은 고려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가 교수, 교직원, 학교 등 권력이 있는 주체로부터 다양한 상황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이야기를 피해자로부터 제공받아 만화화 시킨 작품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규모는 훨씬 더 크지만 문화는 똑같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 특히 서구권의 국가들에 비해 나이, 직위 등에 따른 위아래의 구별이 유별나다. 예부터 내려오는 뿌리 깊은 유교사상과 법률에 의한 징병제로 대부분의 남성들이 겪는 군 경험 등이 왜곡되고 와전됨으로 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현대 군대에서도 간부가 병을, 선임이 후임을 지도편달 하게 될 때 육체적 체벌을 하거나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할 비상식적 대우는 군법에 어긋나며 간편한 방식으로 고발이 가능하다. 또한, 장유유서로 대표되는 연령적 위계질서 그 자체도 한 두 살 차이로 윗사람 대접을 받으라는 말이 아니다. 선조실록에 장유유서에 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고 한다.


“향약(鄕約) 속의 옛 규약은 진실로 시기를 기다렸다가 거행해야 합니다마는 그중 한 가지 일은 간편하여 폐단이 없는 것으로서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기에 삼가 계달합니다. 신이 향약의 규례를 고찰해 보니 ‘동류끼리 교접하는 데 다섯 등급이 있는데, 첫째는 존자(尊者)로서 자신보다 20세가 위인 사람이고, 둘째는 장자(長者)로서 자신보다 10세가 위인 사람이며, 세째는 적자(敵者)로서 자신의 나이와 위아래로 10세가 못되는 사람이고, 네째는 소자(少者)로서 자신보다 10세가 아래인 사람이며, 다섯째는 유자(幼者)로서 자신보다 20세가 아래인 사람이다. 존자와 유자가 상대되고 장자와 소자가 상대되는데 향약의 모임에서 유자와 소자는 존자와 장자에게 모두 재배(再拜)한다.’ 했으니, 이는 대개 장유(長幼)의 차서를 중히 여긴 것입니다.”


 위아래 10살 정도의 차이는 적자로서 벗으로 예를 지키며 행동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현재의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기업에서는 1년이라도 높은 선임이 후배에게 고성을 지르고, 누가 봐도 과잉충성으로 지나친 의전을 행하는 것이 능력 있는 직원이며, 진리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에서도 1년 선배가 후배들에게 강요하는 말과 행동양식을 보면 수평적 체계로 발전을 거듭하는 세계적 추세와는 완전히 반대로 흘러간다.


 얼마 전 SBS 다큐멘터리 ‘요즘 것들의 사표’는 신입사원들이 특유의 기업문화를 견디지 못하고 이직을 하거나 꿈을 좆아 새로운 일을 찾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직접 피해 직원들의 목소리를 통해 보여준 국내 굴지의 대기업의 모습은 가관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면전에서 고성을 지르며 보고서를 찢는 모습, 이성 직원에게 당연한 일처럼 행하는 성추행, 부하 직원의 뺨을 때리는 등 대기업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있는 ‘가진 자’에게 예상되는 교양 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이들은 어떻게 이렇게 행동할 수 있으며, 부하 직원들은 왜 이런 처우를 겪어도 참고 견디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것일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듯이 이것이 우리에게 어렸을 때부터 교육되어지는 ‘좋은 모습’이기 때문이리라. 웬만한 부당한 대우는 정신력으로 이겨내야 좋은 사람이며, 위아래의 정확한 구별을 항상 머릿속에 되뇌고 있어야 출세할 수 있고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 부당한 대우를 잘 참고 견디면 과연 건강한 사회가 만들어지는가 생각해보자. 부당한 대우를 견딘 사람들은 승리자로서 승진이라는 결실을 얻을 확률이 높아진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 그들이 윗사람이 되면, 그들이 그렇게 했듯이, 아래 사람에게 그들이 생각하기에 적당한 정도의 부당한 대우를 부당한 것인지도 모른 체 행한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위계질서에서 오는 악습은 슬프게도 항상 세습이 된다. 인간은 본디 간사하기 때문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기 때문이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책은 ‘교수의 주먹’, ‘논문 도둑맞은 학생’, ‘불이익이 무서워 숨겨진 대학원 성희롱’, ‘학생맘 향한 차가운 시선’, ‘논문 대필자의 생’, ‘위장 취업을 거부한 대가’, ‘세습되는 대학원 똥군기’ 등 제목만 보아도 머릿속에 내용이 그려지는 다양한 이야기를 그린다. 혹시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겠는가? 이해하는 그 모습 자체로 슬퍼해야 한다. 연구적으로 가장 존경스러운 교수님들조차 오늘날 학생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글을 시작하면서 책의 내용을 다루기에 앞서 우리나라 전체의 문화로 논의를 확장시킨 이유는 책의 내용이 단순히 대학원의 모습만을 그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자로부터의 약자들을 향한 폭력적인 시선은 개선되어야 한다. 먼저 나를 돌아보자. 운이 좋게도, 나는 한국 입시제도의 특수성으로 인해 좋은 열매를 얻은 가진 자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나보다 어려운 상황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가. 가까이에는 연구실 후배들에게, 멀게는 같이 대한민국을 공유하는 경제적, 육체적 약자들에게, 내가 비판하고 있는 권력자들과 별다를 바 없지 않은가. ‘나 하나 쯤이야 괜찮겠지’라는 생각이 사회를 여기까지 만들어 왔다. 세월이 흘러 내가 윗사람이 되었을 때, 그때의 청년들이 똑같은 비판을 쏟아내고 있지 않기를 바란다. 적어도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곳에는 늘 부당한 대우가 있게 마련이다.’ 라는 명제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물음표를 던질 수 있는 사회이기를, ‘위계질서’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위계질서로 인한 온건한 대우는 상하의 관계를 정립하고 일의 종류에 따라 안전을 지키고, 기술 전수를 수월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오는 의료인, 군인들, 첨단 기술 개발 및 운용에 따른 노하우 전수 등에 적용되는 위계질서는 fast follower로서 현재의 우리나라를 만들어 낸 문화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오랜 기간 전승된 문화는 처음 의도와 다르게 왜곡되는 경우가 많듯 현재의 비정상적인 위계질서는 바로잡혀야 된다. 발전을 위한 위계질서 문화는 그 중심에 발전의 주체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 있는 질책은 하급자도 상급자의 진심을 알기에 발전적으로 수용하며 거대한 시너지를 형성할 수 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더 힘든 사례를 통한 위로는 힘든 상황의 타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내가 예전에는’, ‘옛날에는 말이야’ 식의 무조건 적인 헝그리 정신 강요보다는 하급자를 이해시키는 사랑과 칭찬의 리더십이 꽃피는 세상을 그린다. 성경을 보면 리더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이 나온다. 그 중 약자를 보는 그의 긍휼히 여기는 시선은 진정으로 약자의 발전을 위한 것이다. 그의 말과 행동의 중심에는 아가페 사랑의 본질이 담겨있다. 나는 바뀌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개인이 변화할 때 사회는 분명 바뀐다. 분명한 문제인식을 통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 가치관에 따라 방법이 다를지라도, 현재의 저항도 비판도 없는 식민사관적 지배문화는 개선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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