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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전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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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태인
댓글 0건 조회 5,934회 작성일 16-10-13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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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우리나라는 여러 종류의 혐오 사상들이 팽배해 있다. 특히, 몇 달 전 있었던 ‘강남역 묻지 마’ 살인 사건을 시발점으로 남성과 여성 간의 대립과 혐오는 극에 치닫고 있다. ‘김치남’, ‘김치녀’, ‘여혐’, ‘남혐’ 등의 수많은 키워드를 낳은 성별 간의 혐오는 예전부터 끊임없이 대두되어 왔지만, 최근에 그 수위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단지 성별 간의 대립과 혐오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의 많은 부분에 대립과 혐오가 존재한다. 기성세대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386세대와 현재 젊은이의 대립부터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와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까지 수많은 꼭지에서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으며, 최근 들어서 더욱 심해지고 있다.


   남성과 여성이 대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근대 사회에서부터 현대사회까지, 아니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남녀 간의 큰 갈등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이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사고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90년대를 시작으로 교육의 보편화가 이루어지면서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라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퍼지게 되었고, 학교에서 이러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여성의 처지에서 보았을 때)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려 하니 학교에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교육을 받았던 것과는 달랐다. 1970-80년대에 태어나서 자란 남성들이 지금 40-50대가 되어 사회에서의 주축이 되어 사회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에서는 아직 1970-80년대의 남성중심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다.


   단지 그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산 증인이다. 하지만, 모든 변화에는 항상 과도기가 존재하는 법이다. 1970-80년대의 사회는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였고, 그 시대의 여자는 단지 남자의 뒷바라지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1970-80년대의 남성들이 사회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현재 우리 시대에서 남녀가 동등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사회에 진출한 여성의 입장에서는 사회가 너무나도 남성 중심적인 사회이며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너무나 힘들다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며 이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여성들의 많은 요구에 힘입어 여성할당제를 비롯하여 여성전용 좌석, 여성전용 주차장, 여성전용 화장실 등 ‘여성전용’이라는 머리말이 붙은 많은 것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 20-30대의 여성들과 같이 교육을 받아온 20-30대의 남성들이다. 이들은 분명 같은 또래의 여성들과 같은 조건에서 같은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부터 남자이기에 ‘양보해야 한다’ 혹은 ‘참아야 한다’와 같은 등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무엇보다도 남성이 불만을 가지는 것은 국방의 의무를 위해 2년 동안 군대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사회에서는 여전히 남성중심의 사회이고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많은 부분을 양보한다. 그래서 도리어 남성들은 이것이 역차별이 아니냐며 불만을 토로한다.


   이러한 혐오와 대립에 대해서, 누가 맞고 누가 틀리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에 앞서 하나의 예시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풍선이 하나 있다. 풍선의 입구에 입을 대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면 풍선은 점점 커진다. 크기가 꽤 커진 풍선을 계속해서 분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언젠간 풍선은 터지게 될 것이며, 이것은 풍선 내부의 어느 곳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풍선이 터지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풍선 내부의 ‘다른 부분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부분 때문’인 걸까 아니면 풍선을 ‘비상식적으로 크게 불었기 때문’인 걸까. 아무리 정교하고 잘 만들어진 풍선일지라도 상대적으로 약한 부분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문제의 본질은 풍선을 비상식적으로 크게 불었기 때문에 풍선이 터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대립과 혐오의 문제도 위에서 예시로 들었던 풍선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문제의 본질은 ‘여자가 무슨 일이야, 여자는 남자 뒷바라지해야지’라는 소위 ‘꼰대’ 마인드를 가지고 사회의 주축에 있는 일부 40-50대의 남성중심사상을 가진 사람들일진대, 우리의 젊은이들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서로를 헐뜯고 비난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고 젊은이들의 취업이 힘들어지면서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나누어 먹을 수 있는 파이(Pie)는 점점 작아지고 있으며 작아진 파이의 작은 부분이라도 먹으려고 서로 경쟁하고 싸우기 때문이다. 서로의 힘듦을 인정해주고 이해해주고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고, 단지 자신의 불만을 서로에 대한 혐오로만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문제의 본질은 남성과 여성의 혐오가 아니다. 각자에게 쌓인 분노를 어디에 표출할지 몰라서 애꿎은 곳에 표출하는 현상일 뿐이다. 취업이 힘들어지고 사회가 팍팍해진 원인은 절대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혹은 남녀 서로에게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우리끼리 싸우고 분열한다. 풍선을 크게 불편 가장 약한 부분에서 터지듯, 쌓여온 우리의 분노 역시 마찬가지로 가장 약한 부분에서 터지는 것이다.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소시민적이고 옹졸한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추어준다.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대립과 혐오로 몰아넣은 본질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과 비슷하거나 약한 사람에게만 화를 내고 분풀이를 한다. 김수영의 말처럼 우리는 왜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문제는 우리의 사회 구조와 기성세대의 낡은 사상일진대 힘도 권력도 자본도 없는 소시민들끼리 분개하고 분열한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우리의 분노가 분출되는 곳은 자본과 권력이 있는 강한 자들에게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한 부분인 안정된 직장이 없는 젊은이들과 사회적 약자인 외국인, 힘없는 노인과 신체가 불편한 장애인에게 이다. 나치가 국민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유대인에게 시위를 겨눈 것도 히틀러가 사람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

(중략)

...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으로서 마땅히 ‘왕궁의 음탕’이나 ‘언론의 자유’, ‘월남 파병’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문제를 직면하고 비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자신과 비슷하거나 자신보다 약한 소시민들에게만 화를 내는, 소위 '찌질한' 자신을 발견한다. 이 나라의 정치, 사회적인 부조리들에 대해 침묵하지만,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소심하고 한심한 자신을 보았을 때 얼마나 무기력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렇기에 김수영은 이 시를 쓴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직시하고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다시는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과 동시에 부조리에 맞서겠다는 다짐을 보인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찌질함을 남에게 보이는 일은 절대 쉬운 것이 아니다. 이는 시인 김수영이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김수영의 시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고 그가 위대한 시인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1960년대 쓰인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와 비교했을 때,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얼마나 진보된 사상과 권력과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인 김수영에게 우리는 부끄럽지 않은 사회를 만들었다고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는가.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사실 우리가 비정상적인 사회 구조 및 사상이나 권력 혹은 거대 자본에 맞서기는 절대 쉽지 않다. 시인 김수영처럼 단지 자신의 찌질함을 직면하는 것조차도 우리에게는 버겁고 힘든 일인데,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떤 부조리를 보았을 때 그것에 대해 싸우기는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생존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에 대해 싸우고 화를 낸다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해고와 실직이며, 당장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되기에 우리는 쉽사리 이 문제를 다루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분노를 약자에게 터뜨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단결하지 못하고 스스로 분열하는 것이 지배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설 수 없다면 이 문제들을 마음에 새기고 기회를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와신상담의 마음이다. 이것들에 대해서 지금 당장 싸우지는 못할지라도 잊지는 말자는 얘기다. 언젠가 사회의 주축인 그들이 은퇴하고 나를 비롯한 내 또래가 사회의 주축이 되었을 때 그들이 했던 행동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생각을 마음 깊이 새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선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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