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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카이 라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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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준
댓글 0건 조회 886회 작성일 25-11-1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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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를 읽고: 끝나지 않는 춤, 외딴 마을의 절망과 나의 부다페스트

 

크러스너호르카이 라슬로


 

  크라스나호르카이의 사탄탱고는 나에게 쉽게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책이었다. 어렵고 복잡했다. 2025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접해서 더 어렵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끈적한 진흙탕처럼, 이 소설은 독자를 1980년대 헝가리의 외딴 농촌 마을로 끌고 들어간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모든 질서가 무너져 내린 그 황량한 곳에서, 나는 구원받을 가치조차 잃어버린 채 서로를 불신하며 광기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길고 축축한 악몽을 목격했다. 그 끝없는 절망과 무력감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책을 읽는 내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소설의 분위기는 대학생 시절 부다페스트 여행지에서 느꼈던 어떤 기묘한 슬픔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었다.

 

  부다페스트를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그 도시의 웅장함에 압도당했다. 다뉴브 강변의 국회의사당이나 부다 성채는 역사의 무게를 짊어진 채 고고하게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웅장한 건물들 사이에서 느껴지던,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의 기운이 있었다. 마치 그 화려함이 과거의 고통을 덮기 위한 필사적인 방어막 같았다고 할까. 하지만 낮과 다르게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정말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체코 프라하의 야경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했던 기억이다.

 

  사탄탱고 속의 마을은 헝가리에 다른 도시를 가보지는 못했지만, 부다페스트에서 느꼈던 그 슬픔이 더 이상 억눌리지 못하고 진창으로 터져 나온 풍경 같다. 희망과 절망의 경계가 무너진 곳, 끝없이 내리는 비가 모든 것을 씻어내기는커녕 더욱 끈적하고 눅눅하게 만드는 곳. 이 마을 사람들의 삶은 거대한 역사적 격변 속에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된 동유럽 민중의 초상화처럼 느껴졌다.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비참하고 안쓰러웠던 인물들은 아마도 푸타키와 슈미트 부부였을 것이다. 이들은 마을에서 가장 나약하고 속물적인 존재들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필사적인 몸부림 때문에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푸타키는 무의미한 감시 임무에 갇혀 지루함과 고독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그의 삶은 오지 않을 구원, 혹은 오지 않을 변화를 끝없이 기다리는 '대기' 그 자체다. 그는 이 모든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무력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그의 고독은 마치 내가 부다페스트의 웅장한 거리 한복판에서 느꼈던, 수많은 인파 속에서의 외로움과 닮아 있었다. 이상하게 다른 유럽의 도시에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슬픔이 묻어나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날씨가 안좋아서 그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도시들에 비해 살짝 회색빛 필터가 드리워져 있는 느낌과 지금의 기억이다.

 

  슈미트 부부는 서로를 불신하고 경멸하는, 공동체의 해체를 상징하는 존재들이다. 아내는 남편을 증오하고, 남편은 아내를 속이려 든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의 공동 자금을 가로채 도망치려는 얄팍한 계획을 세운다. 그들의 관계는 사랑이나 신뢰가 아니라, 오직 상대방을 이용해 이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이기심으로만 엮여 있다. 그들의 계획이 얼마나 필사적이고 동시에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기에, 그들이 결국 이리미아시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때의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었던 가장 순진하고도 비열한 사람들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이리미아시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이 모든 나약한 영혼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푸타키와 슈미트 부부처럼 절망 속에 갇힌 사람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배신과 속임수를 잊고, 그를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리미아시는 구원자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절망과 탐욕을 조직적으로 이용해 공동체를 완전히 해체시키는 파괴자였다.

이리미아시의 귀환은 이들에게 잠시 '움직이는 이유'를 제공했지만, 그 움직임 자체가 결국 이들을 더 깊은 고독과 광기로 몰아넣는 과정이었다. 소설의 형식처럼, 여섯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듯했지만, 결국 여섯 걸음 뒤로 물러나 제자리를 맴도는 '탱고'의 순환이었던 것이다.

 

  부다페스트의 웅장함 속에 감춰진 슬픔처럼, 인간이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구원자를 갈망할 때 스스로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었다. 사탄탱고는 나에게,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외부의 구원자가 아니라 우리 내부의 진실된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고 끈질기게 속삭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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