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줄만 내 마음에 새긴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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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줄만 내 마음에 새긴다고 해도」
- 나민애 -
가을이 되면 마음이 슬며시 느려진다.
예전에는 벚꽃이 피는 봄처럼 화사한 계절이 더 좋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조용히 떨어지는 낙엽이 더 예뻐 보이고, 그 잎이 바람에 실려 천천히 흩어지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게 되었다.
캠퍼스 안을 가득 채운 은행나무도, 주말에 걸었던 행궁동 골목의 노란 은행잎도 ,그냥 스쳐 지나가지 못하고 자꾸만 시선이 머물렀다.
그 풍경 속에서 ‘아, 올해도 이렇게 지나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는 계절이 참 느리게 오고 가는 것 같았는데, 요즘은 한 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밀려온다.
그런 마음이 깔려 있던 어느 날, 서점에서 이 책을 우연히 보았다.
사실 ‘나민애’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던 건, 몇 해 전 유퀴즈에서 나왔던 그 방송 때문이었다.
그때 나태주 시인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세상에, 이런 연결이 있구나’ 하며 꽤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 기억이 마음 한 켠에 조용히 남아 있었던 걸까.
표지에서 나민애 교수의 이름을 보는 순간 그때의 놀라움이 다시 떠오르듯 되살아났고 자연스럽게 책을 펼치게 되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시는 김영랑의 「내 마음을 아실 이」였다.
내 마음을 아실 이
아무도 없소이다.
내 마음을 아실 이
하늘밖에 없소이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알아 주지 않으면
어디 가 내 마음을
말하리오 말하리오.
짧고도 담담한 문장인데도 오래 마음에 남았다.
특별한 꾸밈이 없는데, 읽고 나면 사라지지 않고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조용히 울린다.
요즘 들어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마음속 감정들이 정리될 틈도 없이 스쳐 지나가 버릴 때가 많다.
말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도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 하면 이미 감정의 모양이 달라져 있고, 그러다 결국 말하지 못하고 하루가 또 저물곤 한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 “말하리오 말하리오.”가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원래 사람을 조금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으로는 여러 감정이 길게 뻗어갔다 돌아오고, 어떤 감정들은 말하지 못한 채 쌓여 천천히 무게를 갖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마음들을 ‘단 한 줄’이라는 방식으로 비로소 들여다보게 만들어 준 듯하다.
평소라면 그냥 흘려보냈을 감정도 시의 문장과 만나면 잠시 멈춰 서서 그 의미를 곱씹게 된다.
아마도 내가 이런 가을에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은행잎 하나 떨어지는 순간처럼, 조용하지만 확실한 어떤 장면을 마음에 새겨두고 싶었다.
세상은 계속 바쁘고 계절은 계속 달려가지만, 문장 하나가 그 속도를 잠시 멈추어 주는 순간이 있다.
그 한 줄 때문에 마음이 조금 천천히 움직이고, 조금 더 깊게 생각하게 되고, 조금 더 오래 머물게 된다.
아마 올해 가을을 떠올리면, 캠퍼스의 은행잎과 함께 이 책의 한 장면도 같이 떠오를 것 같다.
그리고 계절이 다시 바뀌더라도 이 시 한 줄은 마음 속 어딘가에 남아 한동안 조용히 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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