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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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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희태
댓글 0건 조회 1,010회 작성일 25-11-18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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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자가를 가진 대기업 김부장. 누구나 한 번쯤 부러워했을, 혹은 부러워하라고 강요받았던 그 삶의 주인공이 바로 김낙수다. 이름부터가 이미, 근현대 한국 사회의 특정 세대를 응축해놓은 일종의 페르소나다. 이 글을 읽는 대학원생들이나, 대학원생 꿈나무들이라면 한 번쯤 아침 조회 시간에서, 그리고 학교 가정 통신문 같은 말투 속에서 마주쳤을 법한 얼굴. 유난히 깐깐했던 학생부장 선생님. 그는 그렇게 설계된 인물이다.

김낙수는 조직의 성공을 위해 개인의 삶을 보류해온 사람이다. “지금만 좀 버티면 된다”를 25년 동안 외치며 살아온 세대의 표본이다. 야근이 일상이었고, 휴일 출근이 미덕이던 시절, 그는 회사에 모든 걸 바쳤다. 그 결과로 얻은 게 있다. 서울 자가, 그것도 어렴풋이 용산구 어딘가로 암시되는 괜찮은 동네. 그리고 대기업 부장이라는 명함. 이 두 가지는 한국 사회에서 성공을 말 없이 증명해주는 가장 직관적인 트로피들이다.

중요한 건, 그는 이 공식이 옳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불합리한 지시도, 폭압적인 실적 압박도, “조직이 돌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는 명목 아래 스스로 설득해온 세대. 그 룰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따라온 모범생. 단 한 번의 승진 누락도 없이 25년을 달려온, 말 그대로 강철 기계 같은 인간. 윗선이 요구하는 걸 묵묵히 처리해내는, “일 잘하는 김대리, 김과장, 그리고 김부장”으로 쌓아 올린 서사다.

아이러니는 여기서부터다. 그를 여기까지 끌어올린 그 성공 방정식이,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어버린다. 임원 승진에 목이 마를수록, 그를 남들과 구분해주던 장점들이 시대에 뒤처진 습관으로 퇴색해간다. 조직은 더 빠르고, 더 유연하게, 더 새로운 방식으로 움직이길 요구하는데, 그는 여전히 ‘더 열심히, 더 오래’만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 간극이 바로 김낙수라는 인간상이 마주한 시대적 고뇌의 핵심이다.

김낙수는 이제 50대 후반,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을 둔 아버지다. 그에게 조직은 단순한 직장이 아니라 삶의 좌표였다. 그 세대에게 “어디 다녀요?”라는 질문은 곧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과 거의 동의어였다. 야근은 성실의 증거였고, 상사의 부당한 지시는 조직 적응의 통과의례였다. 그는 그 룰을 빈틈없이 수행한 ‘모범생’이었고, 그 결과로 얻은 서울 자가와 대기업 부장은 분명 그 성실함에 대한 훈장이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믿는다. 이게 삶의 정답이라고.

문제는 시대가 그 정답지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의 언어는 이제 신입사원들에게 ‘꼰대 말투’로만 들린다. 그는 조직의 허리에서, 양쪽에서 동시에 압력을 받는 세대다. 위로는 여전히 옛 방식을 고집하는 임원들의 성과 독촉을 견뎌야 하고, 아래로는 공정과 워라밸, 자아실현을 자연어처럼 구사하는 MZ세대의 새로운 문법을 이해해야 한다. 그는 예전처럼 앞에서 몸으로 뛰며 보여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뒤에서 조용히 사라지기도 애매한 위치에 걸려 있다.

직장에서 김낙수는 여전히 ‘훌륭한 실무자’일 수 있다. 그는 누구보다 빨리, 누구보다 정확하게 결과를 내놓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관리자의 자리는 다르다. 상사는 여전히 그에게 예전의 속도와 결과를 요구하지만, 이제 그는 혼자 뛰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고, 혼자 뛰어서도 안 되는 자리다. 후배들은 그의 “예전에 다 그렇게 했어”라는 경험담에 고개를 끄덕이기보다는, “왜 그렇게 해야 하죠?”라고 되묻는다. 그들이 원하는 건 지시가 아니라 설득이고, 경험의 권위가 아니라 논리의 설명이다.


그런데 김낙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여전히 단순하다.

 

“그냥 해.”


그 한마디는 그의 세대에서는 충성의 언어였지만, 후배 세대에게 번역되는 단어는 다르다. 부당함, 폭력, 불통. 그는 후배를 동료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관리 대상으로 대하고, 또 한편으로는 젊은 날의 자기 자신처럼 다루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의 복제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 위에서 성장한, 거의 다른 종(種)에 가깝다.

집이라고 다르지 않다. 가정에서도 그는 여전히 존경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다. 아들에게 서울 자가는 자랑거리가 아니다. 그 집은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압박의 물리적 형상이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희생했다고 믿고, 그 희생의 결실이 바로 이 아파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서울 자가를 마련해준 든든한 가장이 아니라, 졸업식 날조차 자리에 없는 일 중독자다. 아버지는 여전히 조직을 위해 자신을 갈아 넣는 삶을 정답이라고 말하고, 아들은 그 정답지를 돌려주며 말한다. “제 삶의 우선순위는 회사가 아니라 저 자신”이라고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로 수렴된다.

 

‘이해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작품의 말미에서 김낙수는 아들과 함께 산에 오른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내놓는다. 회사에서 어떻게 버텼는지, 왜 그토록 집보다 일을 우선했는지, 그가 나름대로 옳다고 믿었던 삶의 공식이 무엇이었는지. 그는 처음으로 아들의 언어를 들으려 하고, 아들은 그제야 아버지의 세대를 설명 가능한 타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리해고를 당하고, 여러 굴곡을 겪은 뒤에야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직함이 아니라 사람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부장이라는 호칭이 사라지고, 그냥 김낙수라는 한 사람으로 서게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다시 질문하기 시작한다. 임원이 되지 못한 실패자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행복을 모색할 수 있는 한 인간으로. 

김낙수의 고뇌는 한 개인의 중년 위기가 아니다. 그것은 급격하게 바뀐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헛발을 딛고 있는, 우리 모두의 초상에 가깝다. 과거의 성공 방정식을 품에 안은 채,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어느 세대의 망설임. 이 소설이 끝내 보여주려 하는 건, 그 망설임 끝에서 간신히 손에 쥐게 되는 ‘이해’라는 감정이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아마 끝내 완성되지 않을 프로젝트일 것이다. 다만 김낙수는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간다. 자신의 언어를 강요하는 대신, 타인의 서사를 번역하려는 쪽으로. 서울 자가와 대기업 부장이라는 촘촘한 울타리 밖으로 나와, 그 너머의 삶을 더듬어 보려는 쪽으로. 그 지점에서 비로소 김낙수는, 그리고 이 소설을 읽는 우리도, 아주 조심스럽게 행복이라는 단어를 다시 입에 올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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