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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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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동빈
댓글 0건 조회 723회 작성일 25-12-22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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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

- 피터 홀린스 著 「우리에게는 매일 철학이 필요하다」 를 읽고 -


 “선택은 운명의 경첩이다.” - 에드윈 마컴 Edwin Markham

 

 올해의 에필로그로, 이보다 더 완벽한 프롤로그가 있을까.

 

 문을 여닫을 때, 문을 여닫는 사람도 이를 지켜보는 사람도, 그 누구도 경첩은 눈에 보이지 않고 눈여겨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경첩은 그 문이 그 자리에 있게 된 순간부터 이미 문이 열고 닫히는 방향을 ―그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결정한 상태로 존재한다. 제 몸이 수없이 움직이며 서서히 부서지는 평생의 시간 동안, 경첩이라는 존재로 인해 제 몸의 방향 하나만은 절대 바꿀 수 없는 모습을 보며, 우리의 운명도 그저 무작위로 찾아온 것 같지만 결국 선택이라는 수많은 경첩들로 이어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나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운명처럼 느껴졌던 일들이, 사실은 나로 인해 만들어진 선택의 경첩들로 계획적이면서 정교하게 이어져 왔던 것이다. 한 번 끼우고 나면 그 반대쪽으로 넘어가 부러질 만큼 단단한 용기가 없었기에, 우리 인생에서 선택은 항상 신중하고 치밀해야만 했다. 그러다 문득, 나에게 있어서 운명의 문을 고정한 경첩은 또 어떤 재료로 이어져 왔을까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는 언제나 안정적이다. 앞과 뒤는 서로를 설명하고 보완한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으며, 그 사이에는 분명한 인과가 놓여 있다. 논문을 쓸 때, 나는 이 말을 자주 사용한다. 연구 목적에 따른 데이터가 있고, 분석이 있고, 말하고자 하는 결론이 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는 내 주장이 타당함을 피력하며 동시에 보호하는 단단한 성벽과 같다. 경첩과 문을 결합하는 틈에 정교하게 맞아 떨어지는 나사처럼, 합리성과 정당성을 확보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므로’라는 말에 익숙하고, 안도하며, 앞으로도 이렇게 매끄럽게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저자가 이 책에서 소개한, 플라톤(Plato)의 저서 『국가』에 나타난 ‘동굴에 갇힌 죄수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그러므로’의 세계에 안주하는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동굴에 갇힌 죄수들은, 한쪽 벽만 바라볼 수 있게 묶여 있으며 그 벽에만 비친 그림자를 현실이라 믿는다. 그 벽에 비치는 그림자는, 말을 타고 창을 든 기마병이 수시로 오가며 그 앞을 지키는 사나운 들개도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들이 보는 세계는 나름의 논리로 완결되어 있고, 의심할 이유도 없다. 그림자가 저렇게 움직이므로, 삼엄한 경비, 저것이 진짜다. 그들이 보는 세계는 충분히 설명 가능하며, “그러므로” 충분하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동굴을 탈출해 바깥의 풍경을 보는 순간, 그들의 단단한 ‘그러므로’의 세계는 산산이 부서진다. 사실 밖에선,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창을 든 병사, 말, 들개의 인형을 들고 횃불 앞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결국 동굴을 탈출한 죄수에게는 지금까지의 모든 그러므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세계가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동굴을 나선 이유다. 바깥의 세계는 처음부터 납득 가능한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처음 본 모습은 눈이 아팠을 것이고, 머리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굴을 걸어 나갔다. 이해해서가 아니라, 이해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다시 동굴로 돌아와 말했을 때, 남아 있는 죄수들이 믿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는 그의 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가서 보았던 세계가― 전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단순한 지식과 능력의 양이 아니라, 선택을 위한 선택을 시작하는 태도의 차이에 있다.

 

 우리는 보통 납득할 수 있을 때에만 움직인다. 이해되지 않는 선택은 미루고, 불합리해 보이는 길은 피한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이고, 내가 올해 보았던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삶은 늘 설명 가능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야 옳았음을 알게 되는 결정들, 그 순간에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선택들이 있었다. 반대로, 그렇게도 논리적으로 정리하며 ‘그러므로’라고 결론 내렸던 판단이 결국은 잘못이었음을 깨닫는 순간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삶의 중요한 장면들 역시, 명확한 ‘그러므로’에서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확신은 없었고, 이유도 불충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했던 순간들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데려왔다.

 

 물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다소 부정적이고, 불편했으며, 때론 불합리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앞선 모든 흐름을 거부한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한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압적인 결론은 나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이들에게도 모든 사실관계와 타당성을 부정하는, 선택이라는 경첩의 틀에 강제로 끼워 맞춘 대못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의 그러므로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결국 삶의 모든 순간들은 그러므로의 환상으로만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본인의 그러므로에 환각되어 결국 모두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이탈한 사람은, 자신의 알량한 그러므로 하나가 주변의 모든 이들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보다 고귀하다고 착각하는 비겁한 위선자로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가 진정한 빛을 발하게 되는 순간 뒤에는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복잡한 희생이 뒤얽혀 있었다. 어쩌면 그것들은, 자칫 부정당하거나 외면당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끌어안은 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안전망과 같았다. 이해되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멈추지 않는 태도. 옭고 그름을 아직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살아가겠다는 결심. 우리의 ’그러므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복잡한 철학은, 언제나 그런 불편한 자리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선택은 운명의 경첩이다.

 그리고 그 경첩의 이름은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는 때론 ’그러므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에 억지로 몸을 실어야 한다. 이번엔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또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오면서, 그동안 있었던 수많은 ’그러므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결국 빛을 본 순간들도 있지만, 아직까지 미지의 암흑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순간들도 많다. 그 순간들은 제각기 ’그러므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꼬리표를 달고, 끝없이 충돌하며 치열한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더 머나먼 내일에도 우리는 무수한 운명의 문에 선택의 경첩을 달고 나아갈 것이다. 어쩌면 한번 달고 나면 처참히 부러뜨리지 않고서야 바꿀 수 없는 그 선택의 순간들이, 우리의 현실에게 너무 잔인하고 싸늘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선택의 경첩을 신중하게 달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경첩을 기꺼이 반대로 달아 볼 용기도 필요하다.

 

혼자만 안주하는 세계 안에 머무를 것인지.

지금은 설명할 수 없지만 나아가야만 할 방향을 향해 문을 열 것인지.


File:An Illustration of The Allegory of the Cave, from Plato’s Republic.jpg

An Illustration of The Allegory of the Cave, from Plato’s Republic, illustrated by the user '4edges',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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