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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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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태인
댓글 0건 조회 5,304회 작성일 16-09-09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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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수업


- 강신주 저


   가끔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은 종종 ‘예전에는 시간이 천천히 흘렀는데 요새는 세월이 참 빠르다’라는 이야기를 하신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선배 혹은 친구들도 ‘요즘은 옛날과 다르게 시간이 참 빠르다.’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예전에 비해서 요즘은 시간이 참 빨리 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직 스물다섯밖에 되지 않은 나지만 나 역시도 이 말을 들으면 많이 공감이 된다.


   이따금 예전보다 사는 게 단순해지고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가면 종종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이 있다. 우리는 메뉴를 고르고 메뉴가 나오는 동안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시답잖은 대화를 하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지만,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은 한순간도 심심할 틈이 없다. 밥을 먹기 위해 존재하는 숟가락이 아이들에게는 비행기가 되고, 장난감이 된다. 게다가 식당은 단숨에 운동장으로 변한다. 이처럼 어린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호기심이며 관심의 대상이다. 주변의 모든 것이 장난감인데 지루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우리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이들과는 다르게 주변의 많은 것들을 새롭게 보지 못하고 지루하고 단순하게 느끼는 것일까.

 

   사는 게 단순하고 지루하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우리가 어린 시절의 1년보다 지난 1년이 짧게 느껴지는 이유를 앞에서 말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가는 많은 것들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새롭게 느껴질 것이고,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주위의 모든 사물에 흥미를 가진다. 우리가 살아온 것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첫사랑이 그 어떤 사랑보다 강렬한 것도, 처음 갔었던 여행이 얼마나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한지도, 처음 경험했었던 것들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도 이러한 경험들이 우리에게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각자마다 잊혀지지 않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잊혀지지 않는 경험은 우리의 감정이 파도칠 때 생긴다. 우리의 어린 시절 1년이 지난 1년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때가 우리의 감정이 살아 있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강한 연관이 있다. 감정이 메마르고 얼어붙은 지금은 어제나 오늘이나 감정의 큰 변화가 없어서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껴지는 것이리라.

 

   우리는 자라면서 감정을 조절하는 교육을 받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감정을 억압하는 교육이라고 해야 할까. 어린 시절 우리가 식당에 가서 운동장에서처럼 뛰어놀거나 숟가락 혹은 젓가락을 비행기처럼 가지고 놀 때 부모님은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며, 위험하다며 우리를 제재했다. 중고등학생 시절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연애는 금기시된다. 눈이 내리는 어느 겨울날의 수업시간에 우리들은 밖에 뛰어나가서 친구들과 눈싸움을 하고 싶지만, 우리는 어른들에게 공부가 무엇보다도 먼저라고 강요받는다. 어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번 우리가 요동치는 감정을 경험하게 되면 그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공부는 뒷전으로 미뤄둘 것을 말이다. 우리의 감정을 흔드는 것은 어린 시절 식당의 숟가락이었고 중학교 때의 같은 버스를 타던 여자아이였고, 눈 내리는 겨울날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모두 금기시되며 혈기왕성한 우리들의 감정을 절제하라고 한다.

 

   감정의 억압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심해진다. 군대에서는 감정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군대에서 병장에게 감정을 표하는 이등병은 없다. 소위 ‘까라면 까’라는 문화가 존재하는 곳에서 선임들의 말에 불쾌감을 내비쳤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이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는 겨울날 내리는 눈을 보며 감성에 젖은 군인도 없다. 군인들에게 눈이란 그저 일거리가 늘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억압적인 집단일수록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이다. 상사가 꾸짖을 때 자신의 감정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계에 큰 위협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감정의 억압은 암묵적인 원칙처럼 우리에게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렇듯 우리는 끊임없이 감정을 표출하지 말라고 강요받으면서 감정을 억제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감정을 죽이니 지나가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단순한 풍경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느끼는 것이며, 시간이 참 빨리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을 호수라고 비유한다면, 어릴 때는 작은 돌멩이에도 크게 요동치는 호수였다. 하지만 우리가 자라면서 감정을 억제당하면서 호수는 점점 얼어붙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사회가 바랐던 것은 불쾌감이나 불만 등의 감정을 조절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지만, 절반만 얼어붙은 호수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받았던 교육은 불만이나 분노 와 같은 나쁜 감정을 억제해야한다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이러한 나쁜 감정의 억제들은 기쁨이나 즐거움, 환희와 같은 우리의 좋은 감정도 표현하지 못하게끔 우리의 감정 전체를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얼어붙은 호수는 돌멩이를 던져도 요동치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삶은 과거보다 더 팍팍해졌다. 그만큼 우리에게서 행복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삶의 조건이 악화된 만큼,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기 쉬우니까. 그렇지만 행복하게 산다는 것, 그것은 감정의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분출이 가능하느냐에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닌가...(중략)... 원하는 감정일 수도 있고, 결코 원하지 않는 감정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감정이든지 간에 그것이 내 안에서 발생하고, 또 나 자신을 감정의 고유한 색깔로 물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감정수업>, 프롤로그 p.18

    

 

   <감정수업>의 저자 강신주 박사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온전히 느끼고 살아가려면 얼어붙은 우리의 감정을 녹여야 한다고 말한다. 기쁨, 사랑, 환희 등의 감정뿐만 아니라 슬픔, 비애, 질투 등의 감정도 우리의 얼어붙은 호수를 녹이는데 중요하다고 말한다. 강신주 박사는 위대한 감정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말한 인간의 48가지 감정과 각각의 감정들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문학작품들과 연관 지어 설명한다. 밀란 쿤데라, 펄 벅, 조지 오웰, 빅토르 위고, 오에 겐자부로 등 거장들의 문학이 유명한 이유는 몇 년, 몇십 년이 지나도 그 작품에서 저자가 문학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대부분의 감정을 각각의 문학작품에 빗대어 설명하면서 수많은 감정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다채롭게 하는지를 설명한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사회일수록 억압적인 사회이다. 북한의 실정에서 알 수 있듯이 독재의 아래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제대로,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가. 슬프게도 그렇지 못한 사회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인 집회 및 시위가 알량한 집시법과 도로교통법에 의해 제한된다. 우리나라 최고의 법인 헌법에서도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위법인 집시법과 도로교통법에 의해 억압되고 제압되는 사회를 어찌 억압적인 사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사회가 이렇게 비루하기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의 감정을 살리려고 애쓴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고, 클래식을 듣는다. 또한, 나를 억압할 사람이 없는 그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억압된 감정을 다시 되살리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묻는다. 나는 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쉽게도 최근에 영화를 보거나 노래를 들었을 때 펑펑 운 기억이 없다. 엄청 슬픈 영화라며 자기는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나도 펑펑 울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영화를 보러 갔을 때, 영화를 보고 눈물이 하나도 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슬픈 영화의 스토리보다 내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 더 슬펐다. 어느 순간 나의 감정의 호수가 얼어버린 것이다. 이미 감정이 메말라버린 우리는 삶을 마음껏 향유하지 못한다. 감정이 움직이지 않으니 무엇을 하던지 따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감정이 메말라버린 사람일지라도 ‘사랑’의 감정은 매우 강력하여 그 사람의 감정을 한순간 녹아내리게 한다. 그래서 아마 우리는 소개팅을 하고 연애를 하는 지도 모르겠다. 요즘 대부분의 노래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진 것을 미루어 짐작해보아도 ‘사랑’이야말로 자신의 모든 감정을 일깨울 수 있는 소중한 감정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남아있지 않을까.

 

   강신주 박사는 말한다. 삶의 주인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며, 노예는 감정 표현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억압받는 사회에 우리의 감정을 방치하지 말자.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감정을 깨우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사회야말로 행복한 사회이다. 가짜 민주(民主)주의가 아니라 진짜 민주(民主)주의, 우리가 주인이 되는 사회에 살아야한다. 지금부터라도 감정을 살릴 수 있다면 우리가 세상을 등지는 날 수많은 행복했던 기억과 설렘을 풍성하게 가지고 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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