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제(隋煬帝) -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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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시호를 짓는 시법(諡法)을 보면 굉장히 좋지 않은 의미의 단어들의 존재하는데, 그 중 최악의 시호는 양(煬)이라는 시호이다. 본래 의미는 햇볕쬘, 불에 말릴, 쇠를 녹일 양이라는 의미인데, 이 한자가 시법에 사용되면 다음과 같은 “패륜을 저지르고 음탕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 본래 수양제 양광의 시호는 세조(世祖) 명황제(明皇帝)인데, 양제(煬帝)라는 시호는 수나라 이후 당나라에서 올린 시호이다. 양광이 얼마나 이름난 폭군이었으면 본명도, 원래 받은 시호도 아닌 이후의 왕조에서 올린 시호가 더 유명할 지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나라가 통일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멸망시킨 남조의 진(陳)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진숙보가 받은 시호가 장성“양”공(長城煬公)인데, 그 수나라를 멸망시킨 당나라에서 추증한 시호에 “양”이 들어가 있으니 “양”이라는 단어와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인지도 모른다.
수양제 양광은 즉위 과정부터가 석연치 않았다. 원래는 차남이어서 제위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태자인 양용이 잦은 실책을 하자 기회를 노리며 부모인 수문제와 독고황후 앞에서는 검소함과 예의바름으로 환심을 사고, 집에서는 사치와 향락을 부리면서 눈속임을 하였다. 결국 어머니인 독고황후가 태자를 교체하겠다는 마음을 굳히자, 수문제 역시 태자를 양용에서 양광으로 교체하였고 이는 수나라에 있어서 가장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참고로 수문제는 소문난 공처가이며 거의 대부분의 일을 아내와 의논하여 처리했다고 한다. 이는 보잘 것 없었던 자기 집안에 비하여 아내는 북위(北魏) 시절부터 내려온 선비족 계열의 이름난 가문 출신인 점이 크게 작용했다고 사가들은 판단한다). 이 양광이라는 위인이 정말 치밀한 소시오패스에 패륜아라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 몇 년 후 어머니 독고황후가 사망하자 영전 앞에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하다가 집에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풍악을 울리면서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몇 년 뒤 아버지인 수문제가 붕어하자 후궁인 선화부인을 자신의 후궁으로 만들 정도로 현대의 관점에서도 치를 떨만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즉위 이후에는 연호를 대업(大業)으로 고쳤는데, 통치 13년 동안 그야말로 나쁜 의미로 대업을 이루었으니 연호 하나는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이다. 그 대업들을 나열해보자면 그야말로 고대세계의 폭정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멀쩡한 수도 장안의 황궁을 놔두고 동쪽의 낙양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새로운 황궁을 건설,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화북으로 운반하는 운하를 건설하는 것은 좋은데 그 운하에 띄워서 유람할 거대한 배를 건설하고 운하 옆에는 40개나 되는 행궁(별궁이라 이해하면 된다)을 짓고, 지나가는 마을들마다 호화로운 음식을 바치게 했으며 먹고 남은 음식은 구덩이를 파서 버렸다고 한다. 이 운하를 건설하는데 동원한 인부의 40%가 사망하였다고 하며 사내들로 모자라서 여인들까지 동원하였다고 한다. 아버지인 수문제도 운하를 만들다가 백성들이 고통스러워 한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중단시켰는데, 수양제는 그런거 없이 공사를 강행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폭정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운하 덕분에 강남에서 강북으로 물자 수송이 압도적으로 쉬워져서 송(宋)대에 중국 경제 번영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퇴임한 모 대통령은 “4대강 사업을 후대의 평가에 맡기겠다.”라고 하면서 은연중에 후대에 고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마음을 내비쳤는데, 본인의 생각은 이렇다. 애초에 저 수나라의 대운하는 고대의 물자 수송을 획기적으로 하기 위하여 건설 된 것 뿐이고, 통치자인 황제가 잘못된 방향을 사용 했을 뿐이다. 4대강은 그와 다르게 환경 보호의 기능도 아니고, 홍수가 때문에 주변이 피해를 입어 치수를 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초기안대로 운하를 한 것도 아닌, 아무 목적도 없이 벌인 사업일 뿐이다. 더구나 현대에는 육상에서 철도 운송이 압도적으로 좋음에도 불구하고, 험한 산맥을 뚫고 운하를 파서 수운을 하겠다니 접근법 자체가 잘못되었다.
이야기가 잠시 빗나갔지만 다시 수양제의 대업으로 돌아오면, 북방의 만리장성 개축도 빠질 수 없다. 거기에 더하여 그 유명한 고구려 원정도 포함된다. 4번의 원정에서도 상대의 영토 한 뼘 가져오지 못한 채 막대한 인력과 물자만 소모하였으니, 백성들의 고통이 이루 말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천자로서 위엄을 보인다고 사방을 순시하고 다니며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데,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이 걸작이다.
“중국 고대의 제왕들은 여러 곳을 시찰하는 순수를 통해 천자의 위엄을 이민족들 사이에서 뽐내곤 했다. 그런데 남조의 천자는 완전히 얼간이로, 궁 안 깊숙이 틀어박혀 화장하는 법 따위만 알고 일반 백성들과는 접촉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정치 방식이 가당키나 한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들으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작가의 평이 또 걸작인 것이,
“이런 순행이면 위엄을 내보인다고 돌아다니느니 궁 안에서 화장하는 것이 더 도움 되겠다고 백성들은 생각할 것이다.”
라고 평하였다. 고대의 군주든 현대의 통치자든 국내외를 순방할 때는 필연적으로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 이는 민주 국가도 마찬가지 인데, 검소한 것이 좋다지만 국민의 이름으로 대표한 국가원수가 해외를 나가는데 최소한의 격식은 갖추어야 할 것이다. 격식을 갖춘다는 것은 비용이 들어간다는 의미이고, 이러한 비용은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게 된다. 근 10년간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할 것 없이 해외로 왕래하는데, 정말 국익을 위해서 해외로 왕래하는 공직자들은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할 지경이다. 외교니 연수니 하는 핑계로 해외로 비싼 비행기 일등석타고 왔다갔다하는 것 보다는 자기 집무실에서 스마트폰이나 만지작거리는 것이 국민들이나 국가 재정에는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다.
다시 수나라로 돌아와서, 일련의 대업의 결과는 중국 전역에서 반란으로 치달았다. 폭군이긴 했어도 정예병을 가지고 있는 수양제라면 반란을 무력으로라도 진압할 수 있었지만, 고구려 원정에서 보인 열정을 사라지고 자포자기 한 것처럼 수도인 장안을 버리고 강남의 강도로 일족과 병사들을 데리고 내려가 매일을 사치와 향락으로 일삼았다. 결국 불만을 품은 근위대에게 목이 매달려 살해당하고, 장안에는 자신의 이종사촌인 이연이 입성해서 당나라를 건국하여 수나라는 40년도 안 되서 멸망하였다. 아버지 수문제가 근검절약과 자작농 육성정책으로 국고를 풍족하게 하여 “개황의 치”라고 평가 받을 정도로 태평성대를 일구었지만, 아들인 수양제는 단 13년 만에 모든 것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천하마저 당나라에게 내주었다. 모든 일이란 마치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느껴진다. 쌓기란 신중을 기하여 쌓아야 하지만, 단 한순간의 실수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지도자 한사람이 이렇게 망쳐 놓고도 다시 일어서 패권국가로서 군림하기를 반복하는 중국의 역사를 보면, 중국의 저력이 무서울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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