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쉽게 읽고 되새기는 고전 - 국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충선
댓글 0건 조회 5,566회 작성일 16-08-04 04:16

본문

쉽게 읽고 되새기는 고전 - 국가

플라톤 원저/김혜경 지음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탐구는 꽤나 오래 전부터, 아니 인간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작점부터 고민되어 온 문제 인 듯 하다. 플라톤의 ‘국가’ 는 플라톤의 다른 대다수의 저서와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와 주변인의 대화를 통한 내러티브로 구성되는데, 이 유명한 고전 안에서의 대화의 시작점 역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부터 시작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왜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플라톤의 고찰과 신념이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대한 전개는 다음의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은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이 이롭고 부정의를 당하는 것은 나쁘다고 믿는다. 그런데 부정의를 당할 때 받게 되는 나쁨 또는 해로움은 부정의를 저질러서 얻는 좋음 또는 이로움을 훨씬 능가한다. 물론 누구나 부정의를 저질러 이로움을 누리되 부정의를 당해 손해를 입는 일은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행운이 일어나게 할 능력은 자신들에게 없다. 현실을 이렇게 인식한 사람들은 부정의를 저지르지도 당하지도 말자는 계약을 맺기에 이른다. 이것이 법의 기원이자 정의의 기원이다. -중략- 정의가 좋은 것이기 때문에 정의를 칭찬하는 게 아니다. 정의는 좋은 것으로 수행되는 것도 아니다. 부정의를 저지르기에는 무능한 자들이 마지못해 실행하는 불가피한 것이 정의다. 부정의를 공공연히 행할 수 없는 나약함이 마치 정의를 존중하는 것처럼 가면을 쓰게 한다.”

 

  결국 사람들이 정의를 칭송하고 부정의를 배척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정의 그 자체가 좋은 것이고, 부정의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정의 덕분에 누리는 혜택이나 평판 혹은 부정의를 함으로써 얻게 되는 악평이나 신의 심판 때문에 정의로워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것은 충분히 그럴 듯 해 보인다. 결국 질문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원하는 것은, 정의가 부정의보다 강하다는 것을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평판은 떼어낸 채로 정의와 부정의가 그것을 가진 자에게 무엇을 하기에 그 자체로 나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좋은 것인지 밝혀 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어떠할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 중요한 기본적인 사실을 전제해 놓고 대답을 해 나간다. 그것인 인간이 정치적인 존재, 즉 공동체적인 존재라는 가정이며, 나아가 개인의 구성과 국가의 구성은 서로 동일한 성질을 띄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의미하게 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국가 내에서의 정의를 찾으면 개인의 정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대화를 통해 정의로운 국가는 어떤 국가인지를 반문하면서, 이상적이고 정의로운 국가에 대해 설명하면서 정의로움에 대한 정의를 개인에게도 접목시킨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정의’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람의 본성, 즉 자질이 똑같이 않고 다르며 각자에 본성에 적합한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정의’이다. 최초의 공동체 구성원들 (책에는 농사짓는 사람, 집 짓는 사람, 옷감 짜는 사람, 신발 만드는 사람으로 명시되어 있다.) 은 각각 잘 할 수 있는 일들이 다르며, 각자 자기의 분야에서 다른 공동체의 몫까지 마련하고 공유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본성에 맞는 한 가지 일을 할 때에 그 일을 더 훌륭하게 해내고, 자기의 자질에 맞지 않는 다른 일을 하려고 할 때 ‘부정의’가 발생한다.

 

  이러한 국가에 꼭 필요한 구성원 중 하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지키고 전쟁을 맡게 되는 수호자, 그리고 통치자 라는 계급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수호자와 통치자의 역할의 중요성, 그리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특이할 만한 점은 이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농사짓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 농사짓는 일을 하고, 집 짓는 사람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집 짓는 일을 하듯이, 통치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통치자가 되고, 수호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수호자가 된다는 것이다. 즉,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직분이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개념은 여러 플라톤 철학 반대자들에게 공격을 받아 왔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호자와 통치자의 계급으로 태어나면 다른 사람보다 높은 지위에서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더 호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수호자와 통치자 계급은 개인 사유 재산이 금지되고, 자신만의 배우자나 자녀의 소유 역시 배제된다. 다시 말하면, 생활을 유지하고 전쟁을 대비하기에 충분한 식량과 필수품들은 공급되어야 하지만, 그 이상의 개인 재산은 소유할 수 없으며, 배우자와 자식들을 공유하고 적합한 후손들만이 새로운 수호자와 통치자로 새워져야만 한다. 혹자는 그렇게 되면 국가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호자와 통치자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냐고 물어볼 수 있지만, 수호자들이 호화로운 삶이 아닌 그들의 본질에 맞는 공동체를 위해 몸을 단련하고 지혜를 제공하는 등의 일에 더욱더 영혼의 만족을 느낀다면 공동체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나라가 바로 정의로운 나라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국가에서의 정의관은 그대로 한 개인에게로 투영된다. 개인의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욕구, 기개, 이성이다. 이 세 가지의 요소는 각자 자기의 본질대로 한 개인 내부에서 작용하는데, 욕구가 개인을 통제하게 되면 무절제하고 타락한 사람이 되고, 기개가 개인을 통제하게 되면 모든 순간에 날카롭고 사나운 사람이 된다. 세 가지 요소 중 국가에서의 ‘수호자’와 대응되는 요소가 바로 ‘이성’인데, 정의로운 국가에서의 수호자와 같이 바르게 교육된 이성에 의해 욕구와 기개가 올바르게 통제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개인에게 있어서 정의라 할 것이다.

 

  철학이나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공대 대학원생의 짧은 생각으로는,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에 대한 개념은 조금은 터무니없어 보인다. 극단적인 예로 플라톤의 사상을 현대의 정치와 국가에 대입시켜 보면, 사람들은 날 때부터 스스로의 본성을 깨닫고 각각이 잘 할 수 있는 것들 것 결정함으로써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하고, 나라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모두 버리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보수만을 받을 채 국민들을 계몽시키고 이성적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데에 모든 힘을 쏟으며 그것에 대해 진심으로 만족해야 한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와는 달리 현재에는 수십만 가지의 어떤 본질을 가지는 것이 더 좋을지 파악하기도 힘든 직업들이 존재하고, 특별한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년시절에 자신이 정말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파악하기도 힘들어 졌다. 또한, 요원한 듯 하다. 또, 만약 모든 사람이 자신의 본래 잘하는 것이 무엇인 지 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이 아닌 ‘잘 하게 태어난 것’ 만을 해야 한다면, 그것이 공동체 다수의 행복을 위한 정의인지는 단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그렇다면, ‘국가’에서 주장하는 플라톤의 정의로운 나라, 정의로운 개인에 대한 설명이 더 이상은 유효하지 않은 것일까. 그것에 대한 대답은 나로써는 섣불리 내릴 수가 없을 것 같다. 조화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플라톤의 생각대로 갖춰 졌다는 가정 하에서는 꽤나 이상적인 국가인 것처럼 보인다. 이성적으로 본질적으로 자기가 잘 하는 것을 하며 그것들을 공동체와 나누고, 또한 다른사람 보다 더 많은 힘과 지혜를 가졌지만 이성적으로 모든 호화로운 것들을 포기하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것들은 어떻게 보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정의로운 통제 속에서 느껴지는 뭔지 뭐를 답답함은 단지 지금의 내가 플라톤이 강력하게 비난했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자유의 달콤함에 길들여져서 일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