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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경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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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태인
댓글 0건 조회 5,737회 작성일 16-07-06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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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경보기


강신주 저

 

   나는 어려서부터 경쟁하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치렀던 시험에서 짝꿍의 점수보다 내 점수가 높다는 것을 확인을 때 느꼈던 묘한 쾌감 때문이었을까. 그 시절 나는 지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는 아이였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했던 이유는 어떤 꿈을 이루기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혹은 부모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이 내가 공부했던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1등부터 꼴등까지의 석차가 나란히 적혀있던 종이가 교실의 앞에 있는 게시판에 붙었을 때 제일 위에 있는 내 이름을 보면서 느꼈던, 남들보다 앞선다는 우월감 때문이었으리라. 다른 아이들보다 잘하고 싶다는 욕심과 지기 싫어하는 오기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관성의 법칙은 물리학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 느꼈던 묘한 승리감이 가져다준 원동력은 지금의 나를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남들보다 앞섰다는 우월감보다는 왠지 모를 찝찝한 마음이 생겼다. 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타인들은 모두 나의 잠재적 경쟁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럴수록 묘한 승리감보다는 쓸쓸하다거나 외롭다고 느꼈다. 같이 울고 웃던 친구들이 한순간 내 경쟁자가 되고, 누군가는 경쟁에서 밀려나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 왜 이토록 치열하게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냐는 질문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거리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강신주 박사의 저서 <비상경보기>는 인문학자로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해 극복해야 현시대의 현실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여러 가지의 큰 산 중에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어떻게 우리의 삶의 근간을 흔드는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기존에 자본주의에 대해 경제적인 측면으로 접근한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자본주의적인 삶에 대해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상처받고 병든 우리의 내면을 성찰하게 한다. 언젠가부터 치열한 경쟁이 불편했던 나에게 경쟁의 이면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한 책이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경쟁을 시키는 것이다. 다수가 서로 연대하지 못하게 깨알처럼 쪼개어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면 된다. 단지 1%의 사람들이 99% 이상의 부를 가진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이토록 경쟁이 심해진 것은 그들이 당근과 채찍의 전략을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이긴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승진과 인센티브라는 당근을 제공하였고, 반면에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에게는 실직과 부채라는 채찍이 뒤따랐다. 신자유주의는 교활했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채찍을 맞은 것이 모두 자신들의 경쟁자 때문이라고 여기며 서로에게 불신의 씨앗을 심어주었고, 이로 인해 다수는 깨알처럼 쪼개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모두가 체재 아래의 피해자인데 말이다.


   모든 경쟁이 나쁘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경쟁은 스스로를 자극시키는 원동력인 동시에 지구에 존재하는 인간이 이토록 발전할 수 있는 근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의 경쟁은 단언컨대 인간을 인간 이하의 무엇으로 만든다. 돈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을 근사한 상품으로 만들어야 하며, 내가 원하는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혹은 사회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누군가에게 잘 팔리기 때문이다. 내가 바랐던 모습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에게 가졌던 자긍심을 점점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특히,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생계가 위협에 빠졌을 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함정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먹고 살기 힘들어졌을 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은 더욱 극단으로 치닫게 되며, 사람은 점점 이기적으로 변하게 된다. 자기가 가진 것을 타인에게 나눌 수 있는, 베푸는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인간에게는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남녀 간에 국한된 사랑이 아닌 예수나 부처가 말씀하신 사랑이다. 사랑이 존재했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인간적’일 수 있는 것일진대,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우리에게는 사랑이 사라지고 있다. 경쟁의 논리는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어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사랑은 어느덧 사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전에는 사랑의 결실로 축복받던 아이의 탄생이 지금은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사치가 되어버린 사회에서 절대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아이의 존재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짐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랑보다 돈의 가치가 우선시되는 사회에서 아이의 존재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버렸고, 한때는 축복의 대상이었던 아이가 지금은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로 변모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출산율의 저하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이로 인해 점점 아이들의 수가 줄어들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장년층과 노년층의 비율이 증가하면서 고령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등장과 동시에 저출산화와 고령화는 이미 예견된 결과다. 고령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한 사회라고 볼 수 없다. 자유로운 의지로 생겨난 고령화가 아니라 경쟁으로 인한 삶의 위기 때문에 도래한 서글픈 파국이니 말이다. 노인들의 증가로 인해 청년들이 짊어져야 할 짐의 크기는 증가하며 이와 더불어 청년들이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을 벗어나기 때문에 노인들은 또다시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에 참여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청년들은 왜 자신들이 노인들을 부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노인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먹고 살기 위해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것에서 불만이 생긴다. 이 때문에 계층 간의 갈등은 점점 커지게 되어 쪼개졌던 다수는 더더욱 잘게 쪼개지는 것이다.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경쟁을 조장한 정부가 고령화 사회와 저출산을 걱정하는 것은 양두구육(羊頭狗肉)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로 인한 뒤처리는 경쟁으로 배부른 기업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해야 하는가. 그러면서도 고령화와 저출산화의 대책을 내놓으며 증세 없는 복지를 주장하는 정부를 보면 기만적이기까지 하다. 기업을 배불리기 위한 노동개혁을 주장하는 정부가 이러한 문제를 걱정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정책과 복지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아이를 낳으면 얼마를 준다고 한들, 내 아이가 불행하게 자랄 것 같은 사회에 자식을 낳고 싶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과거에 교육인적자원부라 불렸던 교육부가 ‘인적 자원’이라는 말을 교과서에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다. 사람을 광물과 목재와 같은 자원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돌본다는 것은 불감생심(不敢生心)이다. 자원이 되지 않을 아이들은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않은가. 국가 경쟁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예를 들어 시를 쓰는 아이나 철학을 하는 아이, 판소리나 국악을 하는 아이들은 쓸모없는 자원으로 취급해버리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근본적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육에서부터의 변화가 필요하다. 석차를 세우고 남과 비교하는 교육은 지양해야 한다. 경쟁보다는 협동을 배우는 덴마크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의 교육을 내가 겪어온 우리나라의 교육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의 학교는 처절한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내가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묘한 승리감을 느꼈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부끄러운 일이다. 적어도 내가 미래에 낳을 아이들은 그러한 생각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개인이 생존의 경쟁이 아닌 사랑의 가치에 눈을 떴으면 좋겠다. 훗날에 혹사 나와 내 아이가 길을 가다가 폐지를 줍는 노인을 보거나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노숙자들을 보았을 때, 아이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저런 사람 말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보다 ‘미래에 네가 사는 사회는 저렇게 사는 사람들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라.’라고 하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다양한 사람들을 존중하며, 돈이 아닌 사람에 가치를 두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우리가 우리 후손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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