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튜더스-세계사를 바꾼 튜더왕조의 흥망사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민주
댓글 0건 조회 6,738회 작성일 16-05-31 14:27

본문

영국은 여왕이 통치 하는 기간에 전성기를 맞이한다는 속설이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엘리자베스 1세, 빅토리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통치 기간에 영국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기간에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을 시작하였고, 셰익스피어 같은 걸출한 문학가들이 등장하였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는 식민지 경영이 절정에 달하여 “해가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고, 현재 엘리자베스 2세 기간에는 1,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을 딛고 세계 5위의 경제대국으로 변신하였다. 물론 화려한 영광 이면에는 양극화 문제라던가, 이민 문제, 월가와 함께 양대 금융권을 대표하는 그레이트 런던의 타락이 존재하지만, 영국이 여왕시절에 잘나간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로마제국 시절부터 중세유럽까지 한 때 변방에 지나지 않던 영국이 근대 이후 유럽의 강대국이 된 시점은 튜더왕조 시절, 특히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기간인 점도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튜더 왕조를 영국의 영광스러운 역사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왜 튜더 왕조 시절에 영광을 맞이했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고, 단편적으로만 그 시절의 영광과 이야깃거리에 대해서만 알 고 있을 뿐이다. 역사를 볼 때는 역사적 사실 뿐만이 아니라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 역시 중요하다. 이 책은 튜더 왕조 시절에 일어난 사건과 그에 대한 배경에 대하여 교차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현대 영국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튜더 왕조가 어떤 배경으로 설립되고, 발전하였으며,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하여 이 서적을 통해 살펴보았다.

 

튜더 왕조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그 전 왕조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작은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치룬 플랜태저넷 왕조이다. 리처드 2세가 사촌 헨리 4세에게 폐위 당한 이후 랭커스터 왕조가 성립되었고, 이 랭커스터 왕조는 또 다른 플랜태저넷 방계 왕족인 에드워드 4세가 찬탈하면서 요크 왕조가 성립되었다. (이 혼란기를 장미전쟁이라고 부르며, 전부 8촌 이내의 친척들 간의 왕권 다툼이었다.) 이후 또 다른 플랜태저넷의 방계인 헨리 튜더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요크 왕조를 단절시키고 새롭게 튜더 왕조를 성립하여 헨리 7세가 되었다. 헨리 7세는 내전으로 인한 귀족들의 감소로 이전 왕들보다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 할 수 있었고,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국가 재정을 수습하고 안정된 왕국을 이끌 수 있었다. 구두쇠 왕이라는 혹평을 듣기는 했지만, 국고를 튼튼히 하고 방만한 경영을 하지 않고 검소하게 운영했다는 점에서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헨리 7세가 남긴 유산은 헨리 8세가 이어 받게 된다. 영국 역사에 대하여 약간 아는 사람은 헨리 8세가 어떤 왕인지 잘 알 것이다. 6번의 결혼에서 두명의 부인과는 이혼, 두명의 부인은 참수형, 한명은 사별, 여성 편력이 대단히 심한 왕이었다. 목적은 단 한가지였다. 왕조를 이어나갈 적법한 왕자를 얻는 것. (서양은 동양과 달리 왕이라도 일부일처를 지켜야 했기에 부인 이외의 여인에게서 얻은 자식은 사생아로서 계승권은커녕 왕족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는 이혼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교황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으나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는 어려웠고, 오히려 잉글랜드 내부의 교회에서 반발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반발을 누르기 위하여 각 교구의 주교들을 처형하고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여 자신이 수장이 되는 “수장령”을 발표하였고, 이를 비난하는 화살을 돌리기 위하여 토머스 울지, 토머스 무어, 토머스 크롬웰 등의 수족 같은 신하들을 실각시키거나 처형하였다. 또한 자신이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의회를 강화시켰고, 이 의회를 통하여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할 근거를 법제화 하였다. 헨리 8세의 행적을 볼 때마다 현대의 독재자들의 행동과 비슷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반발 하는 세력은 무력으로 찍어 누르고, 자신의 통치의 나름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새로운 법을 제정하고, 이용가치가 떨어지는 부하들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음에도 죄를 뒤집어 씌어 몰아내는 점 까지 매우 비슷하다. 헨리 8세가 왕 이었음을 감안하여도 이정도면 거의 폭군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다가 사치스럽기 까지 해서 부왕 헨리 7세가 남겨준 막대한 재정도 늘 부족하였다.

 

그럼에도 당시 백성들로부터 호탕한 “해리” 왕이라고 불리었는데, 그 배경에 대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로, 늘 검소하고 우중충한 이미지였던 부왕 헨리 7세에 비하여 헨리 8세는 활동적이었고 대외정책에 적극적이었다. 백년전쟁 이후 내전에만 시달리던 잉글랜드가 이제는 유럽 열강인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관계에 끼어들어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처럼 보이는 점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긍정적으로 보였을 것이라고 한다. 살펴보면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해외순방에 나서 외교를 하고 있는 동안에 국정 지지율이 일시적으로 올라가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내우는 외환으로 다스린다는 말이 있듯이, 내부의 문제에 대한 시선을 자연스럽게 외부로 돌리면 대부분은 외부에 집중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 수장령을 통해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 군사력 강화를 위한 막대한 재정을 확보하였고, 당대에는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이러한 투자는 딸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재미있는 점은 헨리 8세가 자신의 권력를 강화하기 위하여 이용한 의회가 훗날 절대왕정을 뒤엎고 입헌군주국을 만들 수 있게 스스로 씨앗을 뿌린 점이다. 헨리 8세는 스스로가 교회의 최고 수장이며 귀족들을 통제하기 위한 권리를 주장할 근거가 필요했다. 마침 토머스 크롬웰이라고 하는 신하가 왕이 주장하는 권한들을 인정하는 법령을 의회가 통과시키도록 유도함으로써 독재가 합법화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필요에 의해서만 소집되었던 의회를 필수 정부 기구로 변신시켰다. 간단하게 말하면, 왕의 권력은 의회에서 나온 것이 되어버린 형태이다. 당장은 의회의 구성원이 헨리 8세의 수족들이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훗날 왕과 의회가 싸워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엄청난 사건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정책을 수립했을 당시에는 과연 이런 일을 예상이나 했었을까? 아니면 가능성은 있지만 통제가 가능하다고 여겨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을까? 작은 차이가 훗날의 큰 차이가 되는 것처럼, 정책 수립에 있어서 미묘한 차이는 수십 ~ 수백년 뒤에 큰 차이로 나타나게 된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에드워드 왕자가 왕위를 이었으나 얼마 못가 사망하였고, 이복 누나인 메리 여왕이 즉위하였다. 후대에 “피의 메리”라고 불리운 여왕이며, 아버지의 종교 정책에 반대하여 친 카톨릭 성향의 정책을 펼치다 겨우 5년만에 사망하여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 했을 당시에는 선대로부터 이어진 다양한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첫 번째는 종교문제, 친 카톨릭-반 카톨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후계자 문제, 튜더 왕자의 직계후손이 여왕 자신 밖에 없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앞선 문제와 연계된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관계, 유럽대륙과의 외교적인 문제였다. 마지막으로는 선대가 남긴 막대한 재정 적자였다.

 

여왕은 부왕이 남긴 위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종교 문제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어느 편도 들지 않은 채 갈등을 봉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로 인하여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국내외 일련의 사건들에 의하여 자신의 먼 친척인 메리 스튜어드를 처형하게 된다. 이 메리 스튜어드의 아들이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의 후계자가 된다는 점에서 권력의 흐름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이러한 갈등으로 인하여 스페인과의 전쟁이 발발하였고, 무적함대를 격파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반대급부로 국가에는 막대한 재정난을 야기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암울한 시기 나라를 성공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간신히 명맥만 이은 군주인 것처럼 보이나, 훗날 대영제국의 토대를 다진 위대한 여왕이라 불리게 된다.

 

개인적인 가정사가 복잡하고 주변 측근들에게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펼쳤지만 백성들에게는 호탕한 “해리” 왕이라 불린 헨리 8세, 아버지가 남긴 문제점을 평생에 걸쳐 맞닥뜨리고 해결했으나 당대에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엘리자베스 1세, 재밌게도 후대에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저자는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의 배경을 제시하며 여왕에 대한 평가는 과장된 점이 있으며, 이런 평가가 영국의 발전에 신화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후대에 극적인 윤색과 더불어 고평가 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당대의 시점과 배경에서 튜더왕조를 바라보면서 세계사에 영향을 행사한 점은 인정하지만 그리 고평가 하지 않은 점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하지만 본인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일단 국가가 종교, 후계, 외교, 경제 적으로 혼란하고 어려운 시기에 즉위하여 갈등을 봉합하고 하나의 국가로서 나아갈 길을 제시한 점에서 의의가 있고, 이런 배경이 사람들에게는 엘리자베스 1세가 위대한 여왕이라는 점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전쟁의 승리 이후 화려한 영광의 이면에는 백성들의 고통과 국가적 재정적자가 발생한 단점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엘리자베스 1세가 위대한 여왕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는 씨앗이 뿌려지고 난 직후의 시점과 그 씨앗이 자라나서 본 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대에 저평가 받던 사건이 후대에는 고평가를 받게 되고, 다시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지면서 객관성을 띄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지금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20-30년 뒤에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될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현 정권에서 행한 것들은 지금 저평가를 받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