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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황폐화된 지구를 생각해 보자. 전기와 가스로 만들어낸 빛과 온기로 가득한 문명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갖은 동식물이 죽어나가며 모든 것이 불 탄 세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는 절망 가득한 세상을 떠도는 두 부자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혹독한 환경에 맞춰 준비되어 있는, 서바이벌에 능숙한 전직 군인 출신이 아니며 전설로만 전해져 오는 예언의 인물도 아니다. 예상하지 못한 종말 속에서 부인을 잃은 남자는 아이를 데리고 살아남기 위해 불 탄 거리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
지구 종말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장르이다. 이러한 종말물에서 인류와 인류가 이룩해 온 문명은 운석 충돌, 외계인 침략, 세계 전쟁 그리고 좀비 바이러스 창궐과 같은 무궁무진한 이유로 멸망의 문턱에 다다르곤 하지만, 대부분 지극히 평면적이나 영웅적인 주인공의 활약과 그에게 호의적인 우연의 연속을 통해 인류는 기사회생하곤 한다.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을 타파하기 위해서 필연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렇듯 종말물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점진적으로 상황을 개선해간다기 보다 극소수의 인물이 인류애의 소중함을 강조하며 쾌도난마 하듯이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떨까. 서로의 이권을 위해 무분별하게 전쟁이 이루어지던 시대를 거쳐 세상에는 단 하나의 분단국가만 남았을 정도로 평화롭고 질서 잡힌 듯이 보이지만 종교, 인종 그리고 사상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많은 분쟁이 존재하며, 이러한 불씨는 국제기구나 다국적군과 같은 거대 단체의 개입에도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무색할 정도로 이미 잠식된 것처럼 보였던 문제 또한 다시금 수면 위로 고개를 들곤 한다. 이처럼 현실의 비극은 영웅 심리 가득한 상투적인 이야기처럼 간단히 해소되지 않는다.
이렇게 준비된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 <더 로드>의 군상은 추악하기 그지없다. 사회가 붕괴되어 공동체의 의미가 무색해진 작중 상황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사냥하여 인육을 섭취하고 가축 다루듯 지하에 가두어 감시한다. 역사적으로 기근, 전쟁 그리고 조난 등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육을 먹거나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이야기가 종종 전해지는데,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대개 이러한 행동과 입장에 대해서는 거부감과 함께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인한 연민 또한 회자되곤 한다. 하지만 <더 로드>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생존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며, 오히려 몰락한 현실에 이성을 내려놓고 무분별한 자유를 만끽한다는 면에서 고삐 풀린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이런 불한당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주인공은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세상의 몰락 이후 태어나 아름답고 정상적인 사회와 사람들의 모습을 겪어보지 못한 아들에게 이를 전달하고자 하는 모습은 단순히 부성애를 떠나 소중한 것을 지키고 의지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인간애가 더욱 돋보인다.
여느 블록버스터들과 달리, 결국 소설의 마지막까지 인류는 어지러운 상황을 타파하지 못한다. 심지어 주인공은 약탈자로 오해받아 입은 상처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를 상처 입힌 여행자들은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타락하지 않은 자들이지만 불안한 상황에서 오해를 사 서로 공격을 하게 된 것이다. 여행자들을 피해 걸음을 재촉하지만 부상당한 몸을 추스르지 못한 채 주인공은 사망하게 되고, 홀로 남겨진 아들은 약탈자라고 오해받았던, 무뚝뚝하지만 친절하고 착한 여행자들의 일행이 되어 여정을 계속한다. 그와 유사한 의지를 가진 자들과 함께하는 여정을 통해 아들은 인간에 대한 참된 의지와 희망을 전달받으며, 이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지속된다면 인간애를 지키고 이를 아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주인공의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황폐한 세상 가운데서도 희망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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