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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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부자들’은 재밌게 보았던 영화 중 하나다. 정부와 개인 간의 이벤트는 한동안 영화의 좋은 주제로 활용되었지만 이쯤 되면 영화의 주제로는 식상하기 짝이 없을 때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에 ‘언론’을 추가했더니 같은 플롯인데도 전혀 다른 전개가 나왔다. 이것이 이 영화를 좀 더 새롭게 느끼고, 몰입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죽음과 환자의 관계를 의사의 입장에서 조명하는 이 책도 그랬던 것 같다.
죽음을 앞둔 많은 환자들 중에는 임종을 앞둔 의사의 어머니도 있었다. ‘화려하고도 멋진 삶’을 살았다고 말한 어머니는 어떠한 뜻을 담고 삶을 조망한 것인가? 이렇다 할 화려한 삶을 산 적이 없기에, 무엇이 화려한 삶이고 어떤 삶이 비루한 것인가 하는 감조차 없다. 그래도 때로는 속된 말로 잘나가는 삶에 대한, 이를 테면 본능적인 동경이 일 때가 있기도 하다. 그 실체란 누구나 다 아는 것 같지만, 기실 그러한 삶이라고 명확히 정의해 줄 충족조건에 대해서 논하자 할 때면 그것은 무용한 논쟁거리가 되는 것처럼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도리어 그 신기루와 같은 것에 더욱 매력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명확한 근원조차 알지 못한 인간의 삶이란 사실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그러니 평생 공을 들여도 인력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그렇게 목을 매는 것으로, 인간은 인생 최대의 허무를 극복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잊고 싶은 것일지도.
그렇다고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자니, 분명 철학적인 논쟁이 될 듯 하고. 그렇다 한들 본시 철학은 완전 논리를 바탕으로 논하는 것이므로, 도무지 모를 사후의 일을 어찌하려고 따지는지 그 비논리에 죽음에 관한 논쟁은 이미 철학이 아니다. 철학이 아니어서 끝이 없는 논쟁의 대상으로서 형이상학 그 자체로서의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치로 따지자면 우리는 원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므로 죽음도 자신의 선택이 아닌 것일진대 사후까지 고려하기에는 철딱서니가 없다.
화려하고도 멋진 삶이라는 것을 그저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위안한다. 행복한 삶을 위해 조금 쉬어가며 내가 쌓아온 삶이라는 탑을 멀찍이서 감상하기도 한다. 아주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서,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서 위로, 탑의 윤곽을 보다가도 층층이 새겨진 세밀한 조각들에 초점을 맞춰보기도 하면서. 남들은 돌 하나라도 더 쌓으려 할 때 혼자서 신선놀음마냥 세월아 네월아 하지만, 이러한 관찰은 내 삶이라는 책을 좀 더 맘에 들게 다듬을 수 있도록 한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그 페이지의 그림 혹은 사진이 좀 더 마음에 들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지만 나는 아직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읽혀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조금 더 내 색을 가질 수 있다면, 조금 더 뚜렷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러면 좋을 것 같다. 화려하고도 멋진 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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