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채식주의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안현준
댓글 0건 조회 6,256회 작성일 16-06-28 13:45

본문

채식주의자 - 한강


*

 지난 5월 17일, 2007년 국내에서 간행된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세편을 엮은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국제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을 수상하였다. 시인에서 소설가로 변신한 한강씨는 20대 실제로 채식주의자의 삶의 경험을 곁들여 인간의 본성과 폭력성을 날카롭게 그리고 무겁게 녹여내었다. 실제로 한씨는 멘부커 국제상을 수상하며 “내게 소설쓰기는 ‘인간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과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 내용은 기괴하고 난해한 맛 이였다.



*

 최근 몇 달 동안, 구사나기 류순의 ‘반응하지 않는 연습’애덤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이라던지 김정운의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등의 책들을 읽으며 모순된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어떻게 ‘옳은(가치관에 따라서 정답은 서로 다른)’삶을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채식주의자’를 통해 저자 한씨와 돌연 미쳐버린 주인공 ‘영혜’를 두고 스치듯 교감했다.


 "떨면서 눈을 뜨면 내 손을 확인해. 내 손톱이 아직 부드러운지, 내 이빨이 아직 온순한지.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p.43


 배부르게 고기를 먹고, 큰 아파트에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현대인의 욕망 아닌가? ‘채식주의자’에서 어느 날 악몽에서 깨어난 ‘영혜’는 더 이상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다. 그녀는 차갑게 식어버린 쇠의 표면처럼 육식과 함께 모든 욕구들을 잘라내어 간다. 그녀의 남편은 더 이상 식탁에서 고기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녀의 부모도 그녀의 입에 고기를 쑤셔 넣으려 시도했지만 ‘영혜’는 손목을 그으며 강렬하게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남편, 가족)이 좋아하는 육식(‘욕망’)을 병적으로 거부한 그녀는 손목을 그은 순간 미친년이 되어 정신병동에 갇힌다.



*

 "마치 정상적인 여자 같았다. 아니, 실제로 정상적인 여자야. 그는 생각했다. 미친 건 내쪽이지." -p.111

 "처음으로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p.146


 ‘몽고반점’에서 ‘영혜’의 형부는 부인에게 ‘영혜’의 몽고반점에 대해 듣는다. 그는 처제의 몽고반점에 이끌린다. 그는 예술가의 영감에 빠져든 것 인가. ‘욕망’ 없이 무방비하게 개방적인 듯 차가운‘영혜’에게 성적인 ‘욕망’으로 끌리는 것인가? 그 둘은 온몸에 꽃을 그린 채, 나체로 뒤엉킨다. 무방비로 형부의 손에 놀아나는 ‘영혜’는 마치 괴물의 날카로운 이에 뜯겨나가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나무 같았다.



*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p.186


 고기를 먹지 않아 야위는‘영혜’의 건강이 걱정되어서 일까? 고기를 두고 피 터지게 싸워야 하는 이 사회의 룰에 더 이상 따르지 않아서 일까? 어떻게든 ‘영혜’에게 고기를 먹이려 그녀의 팔다리를 묶고 코를 통해 음식을 위장으로 쑤셔 넣은 뒤, 토해내지 못하도록 수면제를 주입하는 의학적 치료는 오히려 폭력적으로 보인다. ‘영혜’의 이성은 점점 식물적으로 변해간다. 그녀의 두 팔은 뿌리가 되고 두 다리는 가지가 된다. 가지 사이에서 꽃이 활짝 핀다. ‘널 살리기 위해서야’ ‘정말 죽으려고 이래?’라는 애타는 주변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한 그루의 나무가 된 ‘영혜’는 나지막하게 ‘왜, 죽으면 안되’라고 말한다.


 포식 동물에서 초식 동물로, 동물에서 식물로 점점 퇴화되어가는 그녀를 우리는 막아야 하는 걸까.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일까? 



*

 ‘채식주의자’에서는 모든 욕망을 덜어낸 ‘영혜’라는 개인과 그녀를 둘러싼 욕망에 젖은 주변인물들을 끊임없이 대조한다. 욕망을 잃으며 식물로 퇴화되어 가는 ‘영혜’를 통해서 저자는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잠정적 결론을 ‘욕망’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육식에서 초식으로 동물에서 식물로 변해가는 주인공의 반대인, 초식을 넘어서 육식을 넘어서 인간은 ‘욕망’그 자체라고 말해주는 듯 하다. 그리고 ‘욕망’자체가 된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 보게 만든다. 그들은 개인의 욕망을 넘어서서 욕망의 끈을 놓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인정하지도 못한다. 이미 ‘욕망’자체가 되어버린 자신을 마주하게 될까 두려워서 일지도 모른다.



*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욕망’덩어리들 사이에서 나무 한 그루로 치열하게 버틴, 모든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죽음을 반기는 ‘영혜’분명 처음에는 한 미친 여자와 그녀를 살리기 위한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 폭력적인 욕망들과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운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면서 ‘영혜’를 괴롭히는 ‘욕망’덩어리들이 미워지고 ‘영혜’와 같은 자유로움을 원하게 되는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욕망’을 위하여 끊임없이 분투하는 것이 이성적인 것일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유로워 지는 것은 미쳐가는 행동일까? 세상이 쥐어준 의식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저자 한강씨와 비슷한 고민에 닮은 답을 내어놓는 것 같아 마음이 정리된다기 보다는. 공진주파수처럼 그녀의 생각과 스치는 이 순간 더 들뜬다.



*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p.197


 그 기괴함은 고어물 같고, 뇌쇄적인 매력은 에로영화 못지 않은 철학책 ‘채식주의자’ 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