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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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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5,534회 작성일 16-04-04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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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이규섭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은 불행하다. 개인의 자유와 행복의 보장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에 살면서 이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 우리의 주인공은 원래 사진가가 되고 싶은 소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망한 사진가 지망생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저 부유한 집에서 나오는 용돈으로 현실적인 어려움을 회피하면서 적당히 열심히 노력하는 것으로 자기만족하고 있을 뿐인 그런 적당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한 살씩 먹어감에 따라 주변의 시선과 불안함 때문에 결국 자신을 기다리는 안정적인 생활로 돌아오게 된다. 그토록 미워하던 아버지의 조언대로 그는 로스쿨에 들어가 월가의 신탁유산 부서 변호사로 자리 잡아 ‘단순한 서류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을 보장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과거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자신이 그 꿈을 지속하지 않았던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사진은 여전히 취미로 이어가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삶이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꿈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삶은 생각보다 평온하지 않았다. 직장 일은 따분하고, 이미 중년의 나이임에도 그는 아직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내는 그와의 결혼이 자신의 삶을 망쳤다고 생각하고, 가정의 분위기는 늘 엉망이다. 그러나 어느 날 아내와의 관계가 원만해졌다고 생각했더니, 아내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한심한 놈이랑. 그토록 버리고 싶었던 삶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파괴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자기 아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친다. 아내의 불륜을 확신한 그 날, 그는 순간의 분노로 아내의 내연남 게리를 살해하고 말았고, 그토록 던져버리고 싶던 자신의 삶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주인공 벤은 자신의 평온한 삶을 포기하고 자수할 용기가 없었고, 그렇다고 자살할 용기도 없었다. 결국, 그는 내연남 게리의 시체를 이용해 벤 자신이 죽은 것처럼 위장한 뒤, 게리로 살아간다. 그는 최대한 멀리 도망가기 위해 서부를 향하던 중 몬태나에 정착하게 되는데, 조용하게 살려는 그의 의지와 달리 그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유명세를 타게된다. 정체가 발각될 그 위기의 순간에 그가 가져온 게리의 차를 지인이 음주 후 운전하다 사고로 사망하게 되는데, 시체가 과하게 훼손되어 게리가 죽은 것으로 처리 된다. 벤도, 게리도 법적으로 사망한 것이 되어 세상에 그가 존재할 곳이 다시 사라지고 만 것이다.

결말에서 주인공은 결국 어떤 벌도 받지 않는다. 그저 서부에서 만난 사랑하는 여인과 새로운 장소로 떠나 새로운 이름(앤드류)으로 다시 삶을 시작하게 된다. 기이한 운명이 살인에 대한 대가라고 하기에는 뚜렷한 벌도 아니거니와, 애초에 소설이 그런 인과응보의 성향을 띠고 있지도 않다. 주인공의 이름이 두 번이나 바뀌는 조잡한 플롯을 만들어내면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벤-게리-앤드류(모두 주인공의 이름이다.)는 안정된 삶이라던가 책임져야 할 가정 등의 의무에 얽매인 삶을 살았고, 더욱이 그러한 의무는 자신의 꿈을 희생하고 선택한 결과였다. 언제나 그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막상 벗어나게 되었을 때는 기구한 운명만이 계속되었고, 결국 다시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한곳에 정착하게 된다. 마지막 장을 보면 주인공은 벤-게리의 삶에서 완전히 해방된 삶을 시작했음에도, 그곳에서 떠나고 싶은 욕구가 들 때가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다 어느 날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동부를 향해 달려가다, 결국에는 다시 차를 돌려 돌아오고 만다. 차를 돌려 돌아왔을 때 그를 반기는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말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원하지 않게 얻은 의무라 해도 내가 지고 있는 짐은 나의 몫이며, 그 또한 자신의 선택이라는 것을 주인공이 소설 속의 과정을 통해 깨달았다는 뜻인가 유추해 볼 수는 있겠다. 허나, 전체적으로 작위적인 느낌을 지우기는 어려웠던 거 같다. 아무리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한 수단이라지만, 살인이라는 극단적 소재를 사용해야 했는지가 의문이다. 아니 살인을 소재로 사용했다는 것 자체보다 살인 이후 주인공이 살인 자체에 대해 죄책감이나 자괴감을 느끼는 부분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어 이것이 단순한 장치라는 인위적인 느낌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두 번째 이름을 잃어버리는 과정 또한 황당하고, 살인 이전의 박진감 넘치는 전개와 주인공의 복잡하고 초조한 심리 상태의 묘사에 비해 소설의 핵심인 2, 3부의 내용이 별다를 바 없던 점도 당혹스러웠다. 원래 소설의 구조에 지나치게 완벽을 요구하는 타입이 아님에도, 이런 부분들이 거슬리다 보니 소설의 의도 파악이 어려워 불만스러웠던 것 같다.

결국, 책의 내용을 용 써서 해석해야 했다. 책 자체는 프랑스에서 굉장히 잘나갔던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재미는 있었지만, 무언가를 느낀 것은 별로 없었던 거 같다. 내가 가장이 되어 본 적도 없고, 완전한 사회적 의무를 진 적도 없어서 작품의 깊이를 느낄 준비가 되지 못한 것일까. 일단은 그런 것으로 해두고 언젠가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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