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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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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유진
댓글 0건 조회 5,826회 작성일 16-03-0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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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요즘 테러방지법과 관련된 필리버스터(filibuster)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의회 안에서의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이뤄지는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행위’라는 필리버스터의 사전적 의미처럼, 서로 다른 이념과 가치관을 갖는 사람들이 공동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서는 자아 성찰뿐 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관심과 이에 따른 간섭을 포함하는 사람들과의 소통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설령 사람들의 어떠한 주장이 공익이 아닌 자신들의 이권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당파 간 대립이나 ‘공평하게 케이크 자르기’의 이야기처럼 사회 전반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서는 균형 있는 견제력을 갖춘 서로 다른 집단 간의 경쟁을 필수적이다. 때문에 현재 화제가 되고 있는 현안의 정치적 이슈를 떠나, 여당과 야당의 이러한 대립은 정치에 무관심한 세대에게 안건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등 긍정적인 면모가 크다고 생각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통의 이해나 목적으로 일치된 집단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규제와 제재 하에 생활권을 침해받을 수 있다는 점은 과거, 그리고 현재에도 남아있는 일당독재국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면모는 북한이나 아프리카의 여느 독재 군부 정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동양 문화의 주축이며 아시아의 마지막 용으로서 입지가 견고하나 국민 통제와 인권 억압 문제가 심각한 중국,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 경제 수준을 자랑하지만 언론, 정치 자유도가 낮아 전근대적인 모습을 지닌 싱가포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나, 이런 나라들의 국가 운영에는 어떠한 면모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떤 가상의 세계를 생각해 보자. 정부가 사회를 개인의 능력에 따른 직종을 결정하고, 개인은 계획된 직업 배분에 따라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며 그 대가로 정부가 불편함 없는 생활수준과 여가를 보장하는 사회가 존재한다면,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흔히 나타나는 과도한 경쟁과 착취에 따른 부작용이 없는 좋은 사회처럼 보인다. 절대 다수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타인에 대한 베타적인 태도가 존재하지 않아 유례없이 안정되어 있는 사회. 하지만 이러한 사회 유지를 위해 정부에서 고의적으로 신생아들의 지적, 신체적 수준을 조정하여 등급을 나눠 사회적 역할을 배분하고, 불필요한 사고를 차단하기 위해 다양한 감정을 유발할 수 있는 문화 예술 요소를 통제하고 체제를 세뇌 시킨다면 이를 이상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올더스 헉슬 리(Aldous Huxley)의 소설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 1932)>는 극도로 발달된 과학 기술이 이를 가능케 하는 가상의 미래 사회에서 제도에 불만을 품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보여준다. 인류 사이에 있었던 대규모 전쟁 후 과학 기술을 근간에 둔 안정된 사회를 이룩하고, 감정의 소용돌이를 유발할 수 있는 문학 작품이나 종교, 철학 등 비과학적 요소를 배척함으로써 사람들의 정서적 안정을 도모한다. 비록 비인격적 대우를 받지는 않지만, 이 세계에서 안정된 시스템에 의문을 품는 소수의 ‘독창적인 사고’를 갖는 사람은 위험 인자로 구분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아이슬란드 등의 오지에서 그들만의 공간을 영위한다.

 

 책의 말미에서 세계 최고 지도자 10인 중 한 명은 독창적 사고를 지닌 일행들에게 자신들이 극도로 통제되고 있는 현실을 옹호하며, 통제되지 않는 비참한 현실에 대한 대가인 몇몇 과잉 보상들에 비해 그들이 제공하는 현실적인 행복은 그다지 찬란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나, 무분별한 자유에 따른 숙명적 패배와 상처 또한 드리우지 않는 웅장하지 않은 행복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지도자는 사실 그들이 배척하는 ‘독창성’의 가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으로, 생산성과 안정성만을 위해 돌아가는 사회의 모습에 탄식하며 남들에 비해 강한 자의식으로 인해 격리된 자들을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즉 그는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해 스스로 인지하고 있으나, 사회 유지를 위해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어떤 권리를 포기하는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상기 언급하였던 무소불위의 힘에 따른 일방적인 운영이 얼마나 편향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지 잘 보여준다.

 


 저자인 올더스 헉슬리가 단지 과학 발전과 인류애 고갈에 따라 예상되는 어두운 미래상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세계 대전을 겪고 진영 간의 대립과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멋진 신세계>가 던지고 있는 인류가 나아가야 할 유토피아의 방향은 무엇이며 이를 위해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떠한 가치가 반드시 옳다고 저울질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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