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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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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충선
댓글 0건 조회 6,125회 작성일 15-09-30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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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  - 더글라스 케네디


  소설의 1부가 시작되는 1960년대 중반은 베트남 전쟁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닉슨 대통령 시절로, 베트남 반군을 상대로 미군이 패배할 확률이 높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베트남 반전운동이 거세게 진행되던 때였다. 주인공인 한나는 전쟁을 반대하는 분위기와 더불어 자유와 평화, 개인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히피 문화’ 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파고들던 이 때에 대학 시절을 보낸다. 한나의 아버지는 반전시위의 최전선에 서서 유명해진 대학 교수로써, 항상 안정적이고 지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에 반에 이름있는 예술가로써 활동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차갑고 자신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한나는 두 가지의 성격 - 어머니와의 적대감에서 생긴 안정감이 있는 가정을 갈망하는 성격과 아버지의 성향을 물려받은 진보적이고 변화를 추구하는 성격 - 을 가지게 되고, 일생 동안 이 두 가지 성격은 충돌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좋은 책의 요소 중 하나는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생각할 만한 명제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에게는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었다. 안정을 추구하는 것과 변혁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타고난 것을 추구하는 것과 환경으로부터 만들어진 영향으로 내 가치를 변화시켜 가는 것, 이런 것들은 내 생각 속에서도 시시때때로 충돌하고 있는 가치 이지만 쉽사리 답을 내릴 수 없는 가치이기도 하다.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한나는 대학시절 처음 만난 남자친구인 의대생과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고, 곧바로 시골마을로 옮겨가 살아가게 된다. 대형 마트도 없는 시골마을, 이웃사람들끼리의 일이라면 삽시간에 소문이 퍼질 만큼 소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 안에서 그녀는 답답함을 느끼지만 자신의 본능적인 자유주의적 성향을 억누른 채 살아간다. 심하게 억누른 것은 결국은 터지는 법, 남편의 아버지가 병에 걸려 집을 비운 사이 그녀 앞에 아버지와 함께 반전운동을 했던 동료인 ‘토비어스 저슨’이 아버지의 부탁으로 그녀의 집에서 잠시 묵게 되고, 세련된 말투와 진보적 성향, 그리고 광범위한 지식에 매료되어 그와 함께 동침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국방부청사 테러범 두 명을 숨겨준 혐의로 FBI 에게 쫓기고 있는 처지였다는 것과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녀에게 했던 사랑의 달콤한 말들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난다. 한나는 심한 배신감을 느끼지만 그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차로 그를 미국에서 캐나다로 도피하게 해주고, 그 후로 자책감과 남편에 대한 미안함은 간직하며 자녀들을 보는 것을 낙으로 살아간다.


  약 30년 뒤, 한나는 존경 받는 교사로, 남편은 성공한 의사로, 아들은 안정적인 삶은 추구하는 보수주의 변호사로, 그리고 딸은 펀드매니저로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 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책감과 본능을 억누르던 답답함 속에서 지속 되었던 결혼생활은 그러한 부모를 지켜보고 자라왔던 딸의 의존적인 성격을 형성했고, 결국 유부남과의 실연에 절망한 딸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방송에도 출연했을 정도의 유명한 의사였던 유부남과 전도유망한 펀드매니저의 불륜과 실종 스토리는 특종을 낼 거리를 찾아 다니던 기자들과 방송국들에게는 부풀리기에 좋은 먹잇감이었다. 방송은 딸의 실종과 유부남과의 연애를 한나의 잘못된 가정환경 형성이 원인이라며 몰아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몇 십 년 전 그녀를 속이고 떠났던 ‘토비어스 저슨’ 은 회심한 기독교인이자 보수주의자로 둔갑하여 자서전을 내는데, 그 책 속에는 그녀와의 동침과 캐나다로의 도피가 마치 한나가 사랑에 빠져 자발적으로 그를 도와준 것처럼 표현되어 있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대중과 동네 주민들은 한나를 나라를 배신한 배신자, 그리고 가정을 파탄시킨 파렴치한 여자로 몰아간다. 결국 남편에게는 이혼을 당하고, 아들과는 연락이 단절되었으며, 20여 년이 넘게 몸담았던 일자리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 준 것은 다름아닌 대학교 때문에 매우 가깝게 지내왔던 친구 ‘마지’ 였다. 마지는 성공적인 홍보회사 CEO 였는데, 그녀의 물심양면적인 도움으로 한나는 조금씩 평정을 되찾고 대응해 나간다. 결국 ‘토비어스 저슨’ 의 말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30여년 전 한나가 살던 시골마을의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낱낱이 밝혀 지게 되고, 대중들과 주민들의 한나에 대한 오해가 풀리며 관계가 회복된다. 그 후 소설은 한나가 30여 년 전 남편과 결혼하기 위해 포기했던 일 – 미국을 떠나 자유의 도시 파리에서 거주하는 일 – 을 하기 위해 미국을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책이 나에게 던져는 화두는 두 가지였다. 바로 더 나은 가치 판단의 기준과 특정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에 대한 옳고 그름의 여부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진취적으로 꿈을 가진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자라왔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그것은 어린 나에게는 마치 좀 더 높은 지위를 가지지 않으면, 혹은 항상 무엇인가는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으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어떠한 사람이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선호한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서 꿈이 없는 사람이라고 욕할 수 있을까? 혹은 반대로 어떤 사람이 진취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것을 선호한다고 해서,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손가락질 하거나 꿈꾸지 못할 나무는 쳐다 보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책에서도 정답은 제시해 주지 않는다. 단지 주인공 한나의 모습 속에서 독자의 성향에 따른 열린 결말을 주고 있을 뿐이다. 책을 덮고 나서 바로 이것이 정답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던 간에 나에게 열린 결말일 뿐, 나의 행복 그리고 거기로부터 파생된 주변의 행복을 높이는 나 자신의 선택과 그 선택에 대한 확신, 그것이 올바른 가치 추구가 아닐까.


  비슷한 맥락에서 특정인에 대한 판단,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깊이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 혹은 소문을 통해서, 방송을 통해서 알고 있는 - 사람들에 대한 편향적인 판단 역시 심각하게 재고해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에서 기자들에게 쫓기고,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한나는 학교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 숲을 빠져나오면서 한 기자의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겁니까?’ 라는 질문에 “절대로 사과하지 않아요” 라고 소리치고 만다. 물론, 이 장면은 악의적으로 편집되어 TV 에 방영되게 되고, 한나는 미국을 배신하고 가정을 파탄시킨 범죄자로 미국 전역의 시청자들에게 낙인 찍히게 된다. 이 장면을 주인공의 입장으로 몰입해서 소설을 보던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는 것이 힘이 들 정도였다.


  앞뒤 관계와 당사자의 진의를 무시하고 화제가 되는 대로 편집하여 내보내는 방송, 그리고 그러한 단편들만을 보고 한나를 범죄자로 쉽게 치부해 버리는 대중들은 현실의 악플을 다는 네티즌들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러한 어두운 단면들이 존재하며, 그러한 면만 부각시키자면 이 세상 누구든지 비난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을 ‘판단’ 한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일이지만, 객관적인 증거가 뒷받침 되는 불법적인 것들 그리고 불변의 사실을 바탕으로 한 진리를 판단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가치와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두운 단면을 보고 단지 비난하기 위해 판단하는 것 보다는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사랑으로 사람을 보고 이해해 주며 비판을 하더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행복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는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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